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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Dec 04. 2021

병풍이 될 순 없어

양쌤의 another story 1

  2020년의 우울함은 머리를 써야 하거나 심각하거나 슬픈 이야기를 멀리하게 했다. 그래서 편안하거나 기똥차게 노래를 부르거나 그냥 막 웃게 되거나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게 되었다.

  어느 TV 프로그램이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유명한 골프선수가 나와서 은퇴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IMF 사태를 겪으며 어려웠던 시절, 쟁쟁한 외국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우승한 그 선수를 보며 많이들 즐거워하고 위로받았던 때가 있었다. 은퇴 경기가 열렸던 날이 자료화면으로 나오고 선수가 마지막으로 단상에서 꽃다발을 안고 손을 흔들었다.

  감회에 젖어 그녀를 따라 울컥할 뻔한 그 순간, 앗! 선수 뒤에 유니폼을 입고 쭉 늘어서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그 시선 강탈자는 모자를 벗어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코를 후비고 있었다. 짧은 순간, 아이가 클로즈업되었다. “푸하하하. 쟤 봐 쟤 봐!” 안방에 있던 남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거실로 나왔다. 

 

  나만 본 걸까? 

  아이는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했을 테고 주의를 들었을 테고 온종일 대기하다가 드디어 선수의 뒤편에 섰을 텐데 하필 그때, 참지 못할 가려움이 습격할 줄이야. 어쩌면 아이는 참을 만큼 참은 뒤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은퇴하는 선수에게 집중하느라 자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콧구멍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넣었는데 한 번만 후딱 한다는 것이 너무 시원한 나머지 손을 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건 어른의 생각이다. 코를 후비는 건 비공식적일 때만 혼자 있을 때만 마음껏 하는 거라고 누가 그랬나. 아이는 할까 말까의 갈등 따위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혹여 네가 중요한 행사에 참가한다고 들떴을 너의 부모님이 그 모습을 보고 나무랐으려나. 사실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단다. 코를 판 게 뭐 대수라고. 굳이 잘못한 사람이라면 선수 대신 너무나 귀여운 너에게 한눈파느라 감동적인 은퇴식 영상을 놓친 내가 잘못이지.

  꼬마야, 너는 병풍이 아니었단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지. 바이러스에 일상을 잠식당한 채 넋 놓고 TV를 보던 나를 짧게나마 목젖 떨리도록 웃게 해 주었어. 설령 감동적인 은퇴식 연출을 위한 들러리였다 해도 너는 그 선수보다도 더 큰 감동이었어. 

  오늘의 씬 스틸러(scene stealer)! 당연히 너란다.      


  병풍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냥 병풍은 되지 않을란다. 그 꼬마처럼 적어도 존재감 있는 병풍이 되야지. 병풍 앞에 선 그날의 주인공을 이겨 먹는 병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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