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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Jun 06. 2022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

양쌤의 픽 10 <떡국의 마음> 천미진/강은옥(키즈엠)

  가래떡을 뽑아서 썰어 진한 육수에 보글보글 끓이고, 조심조심 부친 지단을 가지런히 썰고 삶은 고기 찢어서 듬뿍 담은 떡국 위에 얹고, 송송 썬 파와 김가루까지 듬뿍 올리면 소박하지만 감탄을 부르는 떡국이 완성된다. 새해 복 많이 받길 바라는 마음과 정성이 가득한 떡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진한 육수의 맛부터 고소한 김가루까지 하나하나의 맛이 다 떠오른다. 


  천미진 작가가 우리 음식에 대해 쓴 그림책들을 수강생들에게 소개하려고 살펴보다가 '떡국의 마음'이란 그림책을 꽤 오래 붙들고 있었다. 새해에 소개하면 너무 좋을 그림책이지만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이라도 꼭 소개를 하고 싶었다. 시립도서관 문화센터에는 봄과 가을에만 수업이 있어서 간혹 여름과 겨울의 색이 진한 그림책을 소개하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떡을 써는 그림을 보다가 설날을 앞두고 투박한 손으로 적당히 굳은 가래떡을 곱게 써시던 외할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떡국의 마음> 중에서


둥글게 떡을 써는 마음은

둥근 저 태양처럼
너의 새해가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



 몇 년 전 친정에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을 한참 한 적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너무나 많은 질문이 떠올랐고, 그럴수록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서 썼던 글이 있었다.


  그때, 우리 외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내도 친구도 없이 다들 나가고 텅 빈 딸의 집 거실에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하시며 그 긴 날을 보내셨을까? 스무 명도 넘는 손자 손녀의 이름은 다 기억하셨을까? 가끔 흥얼거리시던 콧노래는 무슨 노래였을까? 맨날 똑같은 날인데 콧노래 나올 일이 뭐가 있었을까?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실 때 빼곤 나갈 일도 없으셨는데 왜 그렇게 새벽마다 목욕하시고 곱게 한복 입고 앉아 계셨을까? 무릎 꿇고 날마다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백 년 가까운 세상살이 중에 언제 가장 행복하셨을까? 그 긴 하루를 어떻게, 어떻게 참아내셨을까?

 

  외할아버지는 9남매의 여덟째이자 막내딸인 우리 엄마의 손을 잡고 아흔일곱의 삶을 마감하셨다. 백수하실 줄 알았는데 딱 두 달 자리에 누우신 후 주무시듯 떠나셨다.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외할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일 무렵부터 함께 사셨던 것 같다. 기억도 잘 없는 어린 시절에 아빠의 아버지가 쓰셨던 방을 엄마의 아버지가 쓰시게 되었다. 어렸을 때라 친할아버지의 기억은 얼마 없지만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제법 가지고 있다. 설날이 다가오면 떡국 해 먹을 가래떡을 써시고, 양손을 둥글게 말아 망원경처럼 만들어 벽시계를 보시고, 전복내장을 맛있게 드시던 모습. 겨울에 쓰시던 밤색 털모자, 수학여행 다녀오며 사 드린 왕골 베개, 이가 하나도 없어서 하회탈 같던 웃음, 모든 반찬을 가위로 쫑쫑 잘라 차려드리던 밥상…….

  외할아버지와 외손녀 사이지만 몇 번 본 적 없고 낯설기까지 했을 처음을 생각해 보았다. 십 대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나이, 외할아버지는 아흔을 막 넘으셨다. 그때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셨다. 외할아버지와 나, 76년이란 세월의 차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나는 데면데면했던 적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핏줄이어서인지 크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우리는 각자의 외로움에 빠져 서로를 챙길 여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는 제주도 푸른 바다가 아닌 도시의 낯선 고독에, 나는 사춘기답게 스스로 만든 고독에 각자 전력을 다하느라 말이다. 어쩌면 나는 외할아버지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 아닐까. 그 정도 연세라면 모든 것에 무뎌지셨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 철없는 손녀였던 걸까.

  용두암이 서 있는 바다를 마당처럼 내다보셨을 외할아버지는 고향의 옛길을 머릿속으로 수백 번 걸으며 짠내 나는 물의 향도 수백 번 떠올리셨겠지. 악다구니치던 아들 생각에 마음이 저리기도 하고, 먼저 떠난 아내 생각에 쓸쓸하기도 하며 갈수록 생생해지는 수없이 많은 기억들로 어수선한 날도 있으셨겠지. 사위가 잘한다 해도 눈치가 보였을 테고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텅 빈 집을 홀로 채우고 계셨겠지. 

  외할아버지를 생각할수록 마음에 애처로움만 가득했다. 나는 왜 조금 더 다정한 손녀가 되어드리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의자의 등받이 같은 분이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어른이셨다. 한낮의 고요함이 무서울 때면 헛기침 소리로 안심시켜 주시고, “OO 왔냐?” 한 마디로 쓸쓸하지 않게 귀가할 수 있게 하셨다. 사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실 때면 못 알아듣는 것이 태반이었다. 제주도 사투리를 쓰시는 데다 치아가 하나도 없으셔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각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서로의 말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몇 마디 주고받지 않은 끝에는 늘 할아버지의 함박웃음이 있었다. 아이의 웃음 같았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웃으셨다.


  나의 사춘기에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황혼기에, 혼자인 줄 알았던 시간들 속에 결코 혼자가 아니게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 했던 시간이 있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았어도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어도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 주었던 시간이었다. 외할아버지도 아주 조금은 내가 위안이 되지 않을셨을까. 


  마흔을 훌쩍 넘기고서야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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