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owa May 04. 2022

베짱이답게 잘 살아볼게요

양쌤의 픽9 <나보다 멋진 새 있어?> 매리언 튜카스/국민서관

  필살기, 사람을 죽이는 확실한 기술. 이 살벌한 말을 사용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오로지 나여야 하는, 반박 불가의 필살기 하나 있으면 좋은데 아직 딱히 이렇다 할… 없다.     


  굳이 찾자면 글쎄 뭐가 있으려나. 동네 친구들의 칭찬에 힘입어 남편이 회사 그만두면 김밥집 차려야겠다던 불고기 김밥? 엄마표 묵은지에 두꺼운 삼겹살만 올렸을 뿐인 김치찜? 죽어가는 나무도 살려서 아들 나이만큼 키워내는...(이건 금손도 아니고 무슨 손이지?)     


  <나보다 더 멋진 새 있어?>의 주인공 빌리는 날씬한 다리 때문에 속상했다. 친구들이 비리비리하다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하고 부지런히 먹고 머리를 짜내어 옷으로 가려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날 멀리 산책 갔던 빌리는 미술관을 찾았다. “앗! 바로 저거야!” 집에 돌아온 빌리는 부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관에서 보았던 ‘앙리 마티스’와 ‘잭슨 폴록’처럼, 그러다 요일별로 다른 무늬를 부리에 그렸다. 다리가 아닌 부리에! 친구들은 기발한 생각으로 예술 작품처럼 변신한 빌리의 부리에 감탄했다. 빌리는 멋진 부리뿐 아니라 자신의 마른 다리도 자랑스러워졌다. 가끔 빌리는 부리에 아무 그림도 그리지 않았지만 당당히 걸었고, 친구들은 빌리의 다리와 걸음걸이를 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림책 수업을 하면서 자존감이나 자신감에 대해 아이들과 얘기 나눌 때가 있다. 아이들에게 잘하는 것 한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면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럼 내가 아주 천진난만하게 말한다. 

“있잖아, 선생님은 목소리 엄청 커. 선생님 남편이 그러는데 선생님이 소리 지르면 엘리베이터에서도 들린대.” 

(아주 오래전, 연년생인 애들이 유치원 다닐 때 아랫집에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신혼부부 집이었다. ‘어머님 혼내시는 목소리 다 들려요.’ 옴마야! 나는 웃는 소리도 크다. 그러니 혼내는 목소리야 오죽 컸을까. 세수하라고, 이 닦으라고 들여보내면 둘이서 옷이 다 젖도록 물장난을 해서 화장실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던 날들이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게다가 집 밖에선 서울말, 집 안에선 사투리 폭발인 내 목소리가 그리 예쁘게 들리지도 않았을 거고. 나도 애 낳기 전엔 목소리가 그리 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교양 있는 엄마는 물 건너갔고 그저 ‘죄송합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선생님의 자랑 같지도 않은 자랑에 가만히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아이들은 킥킥거리면서 자신이 잘하는 걸 경쟁하듯 외친다. 아, 그런 거! 남보다 잘하는 어떤 대단한 걸 말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선생님의 자랑인 목소리 큰 것에 상응하는 원초적이고 웃긴 트림이나 방귀 이야기부터 좀 더 다정하고 진지한 자랑도 있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가 없어도 그냥 이 모습 이대로의 내가, 또 네가 귀엽고 재밌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부끄럽지 않다. 서로 자랑하느라 목소리가 커지지만 주눅 드는 아이는 아무도 없다. 동그랗든 세모나든 네모나든 무슨 상관일까. 다 예쁘고 귀한 아이들의 당당한 자기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 빌리는 필살기를 찾고야 말았다. 그 필살기 덕분에 친구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 필살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스러워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알게 된 자신의 능력을 멋지게 펼쳐 보이다가 '원래의 나'를 마주하고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된 거다. 남이 평가하는 '나'가 아닌 내가 아는 '나'를 제대로 보아주고 예뻐하고 다독이다 보면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에 상처를 받더라도 자신을 꿋꿋하게 지킬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빌리는 해냈다. 필살기를 쓰지 않아도 당당히 친구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멋지다 빌리!    


  ‘글 쓰는 베짱이’가 삶의 한 지향점인 나는 오늘도 설렁설렁 글을 쓴다. 소문난 곳 구경 가야 하고, 좋아하는 드라마 본방 사수해야 하고, 궁금한 건 알아야 하고, 그냥 뒹굴뒹굴도 해야 하고 일도 가끔 해야 하니까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글을 못 쓴다. 사람들의 마음을 펄럭여볼 글재주도 없으면서 열심히 쓰지도 않는 배짱 좋은 베짱이. 깊이 없는 글조차도 띄엄띄엄 쓰면서 항상 바쁜 베짱이. 나같이 게으르고 가볍기 그지없는 작가도 있는 거지.

  나는 그저 이런 내 캐릭터를 잘 지키며 가늘고 길게 글을 써 보기로 한다. 글을 쓰다가 마음이 쪼그라들 때면 기도도 해 보고, 짜잔 나타나 응원해주는 이들에 용기도 내 보고, 글을 써 보겠다고 덤벼서 이렇게라도 계속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칭찬하며, 빌리처럼 드라마틱하게 필살기를 찾을 그날도 고대하며 평범한 재주로 인생을 재밌게 살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할 수 없는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