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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매니아 Sep 29. 2023

범상?

 평범함을 뜻하는 범상(凡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호랑이의 얼굴, 범상도 아니다. 범상은 내가 지어낸 말이다. 악상(樂想), 시상(詩想)처럼 범죄의 아이디어, 범상(犯想)이 머릿속에서 예술의 경지처럼 잘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문득 검찰수사관으로 근무할 때 조사했던 한 사건이 기억난다. 지방정부에서 주는 급여지원 보조금을 횡령(유용)한 혐의로 영유아보육법위반죄로 수사를 받고 있는 어린이집 원장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구청으로부터 보조금 유용 사실에 대한 지도점검을 받게 되자, 보조금을 받은 어린이집 계좌가 아니라 자신의 다른 계좌에서 해당 어린이집 교사에게 급여지원 보조금을 주었다면서 이체확인증을 구청에 제출했다. 그것도 한 두 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장이 월급을 줬다고 하는 어린이집 교사와 은행을 상대로 확인해 보니 그러한 입금내역은 전혀 없었다. 구청으로부터 영유아보육법위반 혐의에 대해 추궁을 받는 상황에 놓이자,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탄로 날 것이 뻔한 거짓 자료를 만들어 제출한 것이었다. 영유아보육법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인정하고 선처를 구했으면 될 것을 무리하게 변명하려다 오히려 일을 더 키운 꼴로 보였다.     

 경찰단계에서는 사문서위조(및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는 수사가 안 되었기에 그 부분에 대한 조사 후 입건할 생각으로 피의자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물론 주된 조사 내용은 전반적인 영유아보육법위반 혐의에 대한 것이었다. 혐의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피의자를 상대로 한참을 낑낑대며 영유아보육법위반 혐의에 대해 문답을 한 뒤, 드디어 이체확인증 위조 부분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사실 조사 전부터 피의자가 이체확인증이라는 사문서를 어떻게 위조하였는지 정말 궁금했다. 피의자의 연령대로 보아 그림판이나 그 이상의 고급 프로그램을 이용해 특정 날짜에 특정 금액이 이체된 것으로 꾸몄을 것 같지는 않고, 위조의 공범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검사님도 너무 궁금했는지, 사문서위조에 대한 질문이 나오기 직전부터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나와 피의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체확인증 제출경위, 참고인의 진술과 배치되는 부분 등에 대해 먼저 질문한 뒤, 정리하여 질문했다. “피의자가 제출한 이체확인증은 그 내용이 OOO의 진술, 은행의 계좌내역 등 객관적 자료와 배치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결국 피의자가 이체확인증을 위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위조 혐의는 너무 명백해서 다투는 것을 단념한 것인지, 피의자는 대꾸하지 않고 한숨만 내뱉었다.    

  


 결국 나는 위조 여부보다 더 궁금했던 위조 방법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어떤 방법으로 위조했어요?” 피의자의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까 너무 궁금했던 나와 검사님은 피의자의 입만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보다는 약간 긴 시간의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그 정적을 깨고 피의자가 대답했다. 

 “원래 있던 이체확인증에 숫자를 가위로 오려서 풀로 붙였어요. 그리고 칼라복사했어요.” 


 최소한 그림판 등 사용에 대한 답변을 들은 뒤, 공범에 대한 추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의외의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가위와 풀로 어떻게 이체확인증을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냐고 물으니 대답이 가관이다.


 “원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교사로 오래 일하면, 느는 게 가위질, 풀질뿐이에요.” 

    

 글을 쓰다 보니, 피의자가 탄로 날 것이 명백한 위조범행을 한 것을 보면, 번뜩이는 범죄 아이디어를 가진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체확인증을 현대 기술의 도움 없이 풀과 가위로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도 정말 범상(凡常)한 사람은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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