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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매니아 May 07. 2021

자백하는 피의자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을 때 자신의 혐의에 대해서 부인하는 피의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 입장에서 무척 고맙게도(?) 자신의 혐의를 시원하게 인정하는 다시 말해 자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의자가 자백하는 사건은 검사가 기소를 하여 재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백을 공판정에서도 유지하는 경우 ‘간이공판절차’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절차에는 ‘간이공판절차의 특례’라는 것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전문증거(傳聞證據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을 법관에게 전달하는 형태의 증거)의 증거능력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증거조사 방식도 간이화된다. 수사 단계에서도, 자백하는 피의자의 경우에는 피의자를 강하게 추궁함이 없이 피의자의 자백과 이에 부합하는 증거물을 하나 하나 정리하여 검찰에 송치하거나 기소하면 되기 때문에 자백사건의 처리가 한결 수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명감과 정의감에 불타는 공안직 공무원이 아니라 칼퇴근과 편안한 주말을 원하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백하는 피의자와 부인하는 피의자 사이에서 크게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 가끔 발생하기도 한다. 바로 금요일에 구속사건이 송치되었는데 그 사건이 피의자가 범죄 혐의를 부인하면서 다투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구속사건 송치 당일에는 혐의 유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하지 않고 피의자의 인적사항 및 혐의에 대한 인정 여부 등만을 물어보는 인정신문 위주의 조사만 하는 일반적 관행 때문에, 송치 당일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설령, 금요일 오후에 조사나 다른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구속 송치 당일 조사는 하기에 따라 10~20분 만에도 끝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말을 보내고 그다음 주에 다시 조사를 하거나 추가 수사를 해야 할 때이다. 



  구속 사건이라도 기록 검토 결과 피의자가 자백하고 증거관계가 명확하다면, 검사는 경찰에서 수사한 내용을 한 번 확인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조사하고 공소제기를 할 수 있다. 반면, 피의자가 자신의 혐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투고 있다면, 피의자의 주장을 탄핵하기 위해 증거를 세세히 따져 보고 분석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아지게 된다. 피해자나 목격자 진술을 듣기 위해 대면 또는 전화 수사를 할 수도 있고, 특정사실에 대한 확인이나 분석을 위해  각종 기관에 사실 확인이나 분석 의뢰와 같은 공문 플레이를 할 수도 있다. 또, 증거 확보를 위해 금융계좌 추적을 하기도 하는데, 계좌추적의 경우 공문으로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법원으로부터 계좌추적용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압수수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수사보고서도 정성껏 작성을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검찰에서 피의자를 1차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기간인 10일을 훌쩍 넘게 된다. 1회에 한해 10일 연장이 가능한 구속기간 연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피의자의 자백과 부인은 수사실무적으로 이런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아무래도 휴일을 앞두고 배당된 구속 사건에서 피의자의 자백 여부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금요일에 구속 송치된 사건의 죄명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성적목적 공공장소 침입죄’였다. 피의자의 혐의는 약 5개월 동안 수차례 자신의 주거지 근처 상가 건물에 있는 여자 화장실 용변 칸에 들어가 다른 칸의 여성을 엿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록을 읽어보니 이 피의자가 경찰에 체포되어서 경찰 수사를 받을 때 보인 불량한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경찰에서도 피의자를 더 수사하기가 짜증이 났는지 경찰 구속기간 단 한 차례만 조사를 하고 법정 경찰 구속기간(체포 후 10일)이 만료되기도 전에 추가 조사 없이 검찰로 송치를 한 상태였다. 단순히 수사를 받으면서 경찰을 조롱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경찰에 대해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피의자가 여자 화장실 용변 칸에 들어가 다른 용변 칸을 엿본 것이 확실하다는 여러 명의 피해 여성 진술이를 뒷받침하는 피의자가 범행 당시와 체포 현장에서 신고 있었던 독특한 색의 슬리퍼피의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CCTV 사진(다만, 여성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직접 찍힌 영상이나 사진은 없었다.), 상가 건물 경비원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해당 피의자가 범인이 맞고 피의사실도 인정될 수 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는 경찰 수사 시에 범행을 극구 부인하면서 경찰관을 조롱하고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구속사건 송치 당일은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휴일을 앞두고 피의자와 한바탕 기(氣)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었기에 약간 긴장을 하고 피의자에게 질문할 내용과 피의자의 변명에 반박할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복도에서부터 경찰관에 의해 호송되어 오는 피의자의 모습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는 피의자의 손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더니, 피의자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서서 “저.... 일단 이것부터 읽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피의자가 건네 준 종이를 빠르게 훑어봤더니, 경찰에서 거짓으로 진술을 했고 피해자 분께 죄송하다는 취지의 문장을 꾹꾹 눌러쓴 반성문 같아 보였다.

 

 “이게 뭐죠?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인가요?”


 “네, 맞습니다. 반성문에도 썼지만 제가 한 짓 때문에 너무 두렵고 걱정이 되어 경찰에서는 여성 화장실 용변

칸에 들어가 엿본 사실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지금 많이 편찮으십니다. 제발 선처해 주십시오.”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더더욱 그런 행동을 하지 마셨어야죠? 그리고, 기록을 보니 본인이 그런 행위를 한 증거가 명백해 보이는데 아니라고 발뺌하면서 경찰에서도 불성실하게 조사에 임했던데 어떻게 선처를 바란다는 말입니까? 일단 오늘 조사받고 선처 부분은 검사님에게 말씀하세요.”        


  피의자는 연신 죄송하다고 하면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고 했고, 당일 인정신문 조사 그리고 다음 주 한 차례의 피의자 신문과 간단한 보강 수사 후 순조롭게 기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의자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다고 하여 그 피의자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고, 또 피의자가 범죄 혐의를 부인하니 수사과정에서 불이익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피의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범죄 혐의를 부인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행동을 안 했을 수도 있고, 특정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수사기관에서 추궁하는 것과 같은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비슷한 혐의로 이미 처벌을 받은 경력이 있어서 가중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혐의를 부인할 수도 있다.

 

  인간은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유능한 검사나 수사관이라도 사건의 실체를 100퍼센트 알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피의자 역시 자신의 진의를 은폐하거나 범행을 축소하려는 의도에서 혐의를 부인할 수 있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고려해서 수사를 하는 것이지만, 앞서 든 예에서처럼 객관적인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에는 자백을 하는 피의자에 비해 더 엄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한다. 결국 피의자의 이런 태도는 나중에 재판을 받고 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할 때 이런 식으로 반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한 사실이 OOO, OOO, OOO 등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명백히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점 등......... 이를 양형에 참작하도록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피의자가 자백한다고 해서 마냥 긴장의 끈을 놓고 수사에 임하는 것도 아니다. 피의자들은 거짓 자백을 하기도 하고(공범이나 진범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서), 대충 자백(본인의 더 큰 범죄를 숨기거나 귀찮은 마음에 수사 및 재판절차를 빨리 종결되기를 희망하는 경우) 하기도 한다. 때문에 수사 시간 제약, 수사인력의 부족 등 현실적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자백 사건일지라도 공범이나 진범의 존재 그리고 피의자의 여죄(餘罪) 가능성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수사할 수밖에 없다.   


  유사수신행위 및 사기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피의자가 있었다.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불법 다단계업체를 운영하면서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한 사람이었다. 조사를 받으면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피해자 분들에게 정말 죄송할 따름이라고 했다. 질문 중에 “당시 피의자가 설립한 회사의 자산상태나 피의자의 자력(資力)으로 보았을 때, 피의자는 사람들로부터 가입비를 받고 다단계 판매업자로 등록시킨 뒤 물건을 판매하더라도 이들에게 약속한 금전적 이익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고, 제반 사정을 종합해 봤을 때 피의자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속여서 금전을 편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피의자는 “네, 맞습니다. 처음부터 속일 생각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보통 재산범죄로 조사를 받는 피의자들은 객관적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편취 의사와 같은 범의(犯意)에 대해서는 갖은 변명을 대면서 인정을 잘 안 하거나 주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피의자는 이례적으로 시원하게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고 하였다.   

 

  너무 쉽게 다 인정한다고 말하는 것이 약간 꺼림칙하기도 하였지만, 검사실 수사관으로 근무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내가 조사를 잘하고 피의자도 반성하는 마음에 다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사려고 하나보다.’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또 약간 우쭐한 마음으로 사건 처리를 했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우연히 다른 검사실에서 구속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방 수사관에게 확인해 보니, 앞서 내가 조사했던 사건에서와는 다른 불법 다단계업체를 운영하다가 적발이 되었던 것으로, 범행 기간 일부는 앞선 사건과 겹치기도 하였다. 내가 조사했던 사건에서는 동종전과가 없었고 불법 다단계 업체를 운영하면서 유사 수신한 것 치고는 그 금액이 많지가 않아서 불구속 수사를 했던 것인데, 비슷한 무렵에 운영했던 또 다른 불법 다단계업체가 적발이 되면서 반복해서 불법 다단계업체를 운영하고 유사수신을 하여 금융질서를 어지럽히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여 구속까지 된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피의자가 너무 쉽게 자백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한번 더 살펴보고 한층 더 심도 있게 수사하는 습관이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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