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일상을 외국어로 사는 것은 피곤하다. 무의식적으로 숫자에는 항상 '하나, 둘, 셋' 하듯이 나의 머릿속의 생각의 구조는 한국어로 짜여있다. 그러니 한국어가 아닌, 입과 귀를 통해 드나드는 것들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지치곤 한다.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더 쓰는 것 같다. 다른 날보다 특히 더 기운이 없고 피곤한 날이 있다면, 100미터 달리기로 마라톤을 한 것처럼 하루 종일 온 몬의 신경을 너무 과하게 쓴 것이다. 시간에 비례해 아주 조금씩 적응이 되고 나아지지만, 그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만, 내 생각의 기본 구조가 한글로 짜여 있는 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살짝 부족한 언어 실력이 가져다준 고마운 선물이 있다. 바로 솔직함이다.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히 언어적인 표현이 더 직설적이고 간단하기에 이렇게 길들여졌다. (결코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것이 더 힘들듯이 둘러대고 거짓말하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다. 앞뒤 인과관계도 맞춰야 하고, 거기에 걸맞은 적절한 단어들도 생각해야 하며, 정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살짝의 연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직설적이고 솔직하면, 모르면 모른다,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수월하고 간단하다. 부차적인 것들 말고 그냥 언어에 대한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 말이다.
스페인어를 처음 배울 때, 적당히 못 알아들어도 알아들은 척, 눈치로 많은 부분을 해결했다. 특히 어학코스에서 필수인 돌아가는 질문에서 그랬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나 던지면 그에 따라 시계방향으로, 혹은 반시계 방향으로 대답하는 상황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열심히 구상하기도 하지만,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옆의 사람에게 재차 물어보기도 한다. 혹은 선생님에게 못 알아들었으니 질문을 다시 해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나마 이 경우는 솔직한 경우다.) 이뿐만 아니라 대게의 경우에 쓱 보고 분위기를 판단하려고 하곤 했다. 이렇게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의 행위는 비교적 솔직해지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어찌어찌 아는 지인이 여행으로 놀러 와, 내가 동행해야 하는 경우, 왠지 더 열심히 스페인어를 쏟아내곤 했다. 못 알아들어도 허허허 웃는 것은 물론,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말들도 하곤 했다. 남의눈을 의식하는 순간, 이상하게 솔직해지기가 어려워졌다.
일상의 배경이 직장으로 바뀌며 언어적 습관들은 또 한 번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매일매일, 꼬박꼬박 수많은 시간 동안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겐 금방 탄로 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옆에 앉던 동료에게 나의 언어적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괜찮겠냐고 되물어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좀 피곤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대체로 다행히 동료들은 언어 문제에 대해 친절했다. 어려운 상황이나 단어들로 헤매는 경우, 점잖게 도와줬고, 그 점잖은 예의를 한 번 두 번 반복해서 겪으며 '아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대처해야 하는구나'라고 학습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더 솔직해지고 더 솔직해졌다. 모르면 알 때까지 물어보고, 이해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고마운 동료들 덕에 모를 수도 있다고 틀려도 괜찮다는 것은 느끼게 됐다.
독일에 와서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독일에 올 때, 어학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지라 뭘 숨기고 말고 할 만한 밑천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여유가 없었다. 생존과 직결되어 버렸다. 못 알아들으면 그걸로 끝이었기에 이해할 때까지 손짓, 발짓,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야 했다. 당시는 솔직하고 말고는 더 이상 선택이나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둘러대는 것은 능력 밖이었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이 2년이 넘어갈 때 독일어 과외를 시작했었다. 상대는 한국어를 곧잘 하는 독일인으로 한국인을 상대로 꽤나 전문적인 개인 과외를 했다. 시중의 학원보다 시간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예를 들면 퇴근 후 7시라던지, 상대방과 1대 1 교습이기에 아주 효과적인 학습방법이었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오래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동료들에게 '이제는 독일어로 이야기해줘. 열심히 배우는 중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계기가 됐다.
여러 해 동안 한국어라고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의 수다가 전부이다 보니 한국어 능력이 퇴보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애매한 표현이나 에둘러하는 표현 등은 한국어로는 아주 자신 있었으나 외국어로는 너무 고급의 영역이라 쓰지 못하다 보니 한국어로도 잘 안 하게 되어버렸다. 참 신기하게도 언어적 습관이 점점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것만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그렇게 말하고 듣고 지내니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분명하다.
이제는 솔직하니 마니 그런 걸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더 이상 나의 선택지에 없다. 복잡한 언어생활이 만드는 복잡한 생각들과 이미 많이 멀어져서가 아닐까. 어차피 누군가에게 언어적으로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도 그게 가짜라는 걸 알아버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