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부부 Aug 10. 2020

에라이 무거운 책들

by 베를린 부부-chicken

내 기억이 맞다면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7살 즈음에 저 책을 구입했다. 당시 20여만 원의 거금을 줬던 것 같다. 크기가 꽤 큰 책이다. 한 면이 a3 만 하니 책을 펼치면 a2 크기가 된다. 사진이든 도면이든 스케치이든 시원시원하게 펼쳐지는 게 일품이다. 무게는 7킬로그램이다. 구입 후 초반엔 몇 번 보지도 않았다. 그 후 스페인으로 나가게 되며 수년 동안 묵혀놓기만 하던 저 책을 5년 전쯤 베를린으로 가지고 왔다. 창작욕이 끊어 오르기도 했고 계속 저렇게 썩혀봐야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 책을 가지고 올 때 내 뒤통수에 어머니는 ‘쓸데없이 그런 무거운 책 말고 반찬 가지고 가라’고 쏘셨었다.


난 한동안 전공 관련 서적만 구입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졸업 후에도, 건축과 관련되지 않은 책은 이상하게 잘 손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나와 좀 멀어서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몰입하듯 글에 몰입하는 그 과정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건축 관련 서적에는 항상 구입한 날짜를 책 한편에 적어 놓는 습관이 있다. 학교 다닐 때 책이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탓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쉽사리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책들은 한 번 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보기 때문에 오랜 기간 보게 된다. 몇 년씩 꺼내보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 지금도 책을 사면 구입 시기를 적어놓으려 한다. 그러나 위의 책에는 정작 구입연도를 쓰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고 구입한 책이라 누구와 나눠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 전공서적이라며 구입했던 몇몇 책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지, 한국 본가에 있는지, 이사하다가 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르셀로나에 살던 시절, 수년 후에는 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왠지 모를 확신에 박스에 책을 가득 담아 바리바리 본가로 부친적도 있다. 그중에는 한국을 떠날 때 챙겨 온 책들도 있었고 주섬주섬 스페인에 머물며 구입한 책들도 있었다. 나의 모든 살림이 몇 박스의 상자에 담기던 시절, 무거운 책들은 너무 고맙고 필요하지만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정리를 한답시고 구입한 책을 매번 보내고 받고 다시 가져오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있는 장소에 같이 가지고 있으려 한다.  특히 베를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불편해도 더욱더 그러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본가에 놔두면 나에게 그랬듯 부모님에게 짐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결혼 전, 혼자 한국을 방문하러 왔다 갔다 할 때는 여러 권씩 가지고 왔다. 아쉬운 먹을거리를 내려놓고서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멀리 한국이 아니라 손에 닿는 곳에 놔둬야 한 번이라도 더 볼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메고 이고 싸고 짊어지고 다닌 책들은 이제는 우리 집에 우리 아이 장난감과 함께 섞여 있다. 보고 또 봐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봐도, 나에게 너무 큰 재미를 선사하는 책들은 나에겐 '장난감'과도 같은 존재이다.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꾸준히 노는 것을 보며 왠지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구입했을 때나 수년 전에 들여다봤을 때나 오늘이나 책들은 고요하게 같은 내용들을 보여주는데 그게 볼 때마다 새롭고 처음 보는 것 같은 내용들이 항상 수두룩하다.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섞여 있는 책들. 다행히 책이 무거워서 그런지 아이가 많이 흥미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래서 물어뜯지도 않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회사에서는 반복적인 일이 많아지며 점점 들여다볼 시간이 적어졌다.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이트 들을 돌아다니며 '아 요새 어디에 어떤 작품들이 완공되는구나' 정도는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짧게 짧게 소비되는 인터넷 정보에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요즘에도 아주 가끔씩, 가뭄에 뭐 나듯 건축 서적을 한 권씩 구입하곤 하지만, 예전처럼 자리에 주저앉아 정독할 만한 시간이 많이 없다 보니 갈수록 주저하게 된다. 왠지 그렇게 망설이다가 구입을 반려하는 것에 묘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난 거실 한편에 나란히 꽂혀있는 책들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유료 블로그니 무료 블로그니 건축자료를 접할 수 있는 곳은 넘치고도 넘치지만 난 그래도 책의 큰 페이지를 척척 넘기는 저 기분 좋은 소리가 아직 좋다. 이사할 때마다 한숨을 백만 번도 넘게 쉬게 만드는 무거운 책들이지만 그래도 빳빳한 코팅지에 빼꼼하게 잘 인쇄된 도면이니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재미있기는 하다. 그리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들여다보는 듯한 생각에 더 몰입된다. 그래서 앞으로도 최대한 지속적으로 책은 구입할 생각이다. 꼭 이런 거금의 거창한 책이 아니더라도.



직관적이라기엔 체계적이고 감각적이라기엔 근거가 너무 분명하다. 작은 것 하나조차도 '그냥'은 없기에 책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더 재미있다.

근대건축의 대가 중 한 명인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에 대한 책이다. 수백 개의 얼굴을 사진 사나이(The Man with a Hundreds Faces.)라는 지은이의 소제목답게 건축가의 여러 면모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에세이 형식이라 주로 시간대별로 이야기들이 묶여 있다. 지은이의 글 및 건축가 본인의 글,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정보들이 가득하다. 건축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 조각, 가구, 책 등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도 당연히 많다. 책의 두께에서 느껴지듯이 다 들여다보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나는 낱장을 정독하기보단 전체를 여러 번 훎어보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흥미가 느껴지는 페이지에 색인을 표시한다. 지난번 표시한 색인과 이번에 흥미로워 보이는 색인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가격은 구글에 찾아보니 100유로 남짓으로 나온다. 제길, 괜히 비싸게 주고 샀구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