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2월 말의 그라나다(Granada). 봄이 올 듯 말 듯, 겨우내 움츠리고 쪼그러 들었던 마음이 펴질 듯 말 듯할 무렵,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로 향했다. 대체 그 유명한 알함브라(Alhambra)가 어떤 곳인가.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의 흔적이 많다. 꼬르도바(Cordoba)나 세비야(Sevilla)는 무어인들의 흔적과 로마인들의 흔적이 겹치는 건축물을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라나다는 무어인들의 이슬람교 흔적이 지배적이다. 현지의 날씨도 그렇거니와 거의 이베리아 반도를 벗어나 아프리카 북쪽 끝 자락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지었다기보다 손으로 빚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궁전은 1238년에 시작하여 1391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 무하마드 1세는 위축되어가는 이슬람 세력의 왕권을 지키고자 요새를 짓기 시작한다. 삼면이 가파른 언덕 위는 기독교 세력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공격과 방어를 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애초에 방어적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은 요새 안에서 모든 일이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 결과 궁전은 왕족 일가에서 경비원까지 약 5천여 명이 생활하는 작은 도시 수준의 규모였다고 한다. 그렇게 요새로 시작한 알함브라는 술탄에 의해 화려한 궁전으로 변모하게 되고, 1492년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기까지 지상에 내려온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다고 평가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부분은 고작 4%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당시의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도 없다.
-Andalucia (어느 멋진 일주일: 안달루시아) / 이은혜 지음 / 2015년, 봄엔-
체계적인 도시 계획과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교한 장식까지, 그 당시 무어인들의 번영한 경제력과 종교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변화가 많은 아치, 섬세한 기둥, 벽면 장식 등 정교하고 치밀한 이슬람 미술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
맥수아르 궁은 알함브라 궁전에서 초입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공간으로 네 가지 색의 타일과 목조 천장이 특징이다. 왕이 재판업무를 보거나 기도실로 이용해서인지 다른 방에 비해 더 촘촘하고 묵직한 느낌이 든다. 왕은 명확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밀폐된 곳에서 죄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판결을 진행했다고 한다. 지구의 4원색을 상징하는 검정, 파랑, 녹색, 노란색 타일로 장식된 벽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코마레스(Comares)궁전으로 가기 전 왕을 알현하기 위해 모인 각국의 대사들이 대기하거나 왕이 대신들과 물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각국에서 모인 사신을 맞이하기 이해 만든 곳으로 벽과 기둥, 아치와 천장에 빈틈없이 새긴 아라베스크 무늬와 예술적인 코란 글귀가 무척 아름답다. 각국에서 모인 사신을 맞이하는 공간이라는 곳에서 경회루를 떠올렸다. 경복궁의 경회루도 그러고 보면 인공 연못을 파고 섬의 형태로 만든 곳이다.
개인적으로 경회루처럼 활짝 열린, 그래서 탁 트인 누각의 형태가 더 좋다. 반면 이곳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좀 더 명확하다. 인공 연못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지는 햇빛을 가득 담은 가든이 있는 외부 공간과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내부 공간의 교차 또한 매력적인 전개 방법이다.
사막같이 더운 날씨에, 이 넓은 면적을 감싸고 있는 녹색 친구들에게 물을 주는 일은 생각만 해도 어려워 보인다. 계단의 양 옆에 난간처럼 위치한 '수로'는 식물들에게 물을 제공함과 동시에 곳곳의 습기 조절도 하는 기능을 한다.
그 깊고 넓은 건축을 한 번의 방문으로, 몇 장의 사진으로, 혹은 기념품 가게에서 산 책을 통해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대신, 지금까지도 내가 기억하는 강렬한 장면, 다시 꺼내봐도 더 크게, 더 좋은 화질로 꺼내보고 싶은 그 장면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곳이 아벤세라헤스 방(Sala de los Abencerrajes)이다.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모든 장식들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정사각형을 중첩한 천정의 모양만으로 이 공간은 너무 ‘독특’하다. (내가 이 사진을 여느 다른 사진과 다르게 프레임을 틀어지게 찍은 무의식적인 이유. 행여 어느 단체의 상징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 있는 기우). 그 틀에 이슬람 특유의 장식이 더해지니 시각의 유혹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코란에서는 우상숭배를 금기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문양으로 새기지 않는다. 대신 아라베스크 무늬와 코란 글귀등을 섞어 장식을 하니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은 도리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Sala de los Abencerrajes, 아벤세라헤스 방의 중간에는 12각의 분수가 있다. 천장의 모카라베 장식의 화려함이 극에 달한 이 방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 왕이 아름다운 포로를 후궁으로 맞이하려 하자 왕비가 그에 반대해서 쫓겨나고 말았다. 화가 난 왕비는 아벤세라헤스 가문과 손잡고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남자 36명을 참수시킨 피의 장소다. 그때 흐른 피는 12각 분수를 지나 정원에 있는 사자의 분수까지 흘렀다고.
-Andlucia (어느 멋진 일주일: 안달루시아) / 이은혜 지음 / 2015년, 봄엔-
사실 큰 틀에서 읽히는 조형감과 자세히 봐야 눈에 들어오는 아주 작은 축적의 장식, 혹은 멋 부림은 현대건축에서도 자주 쓰이는 문법이다. ‘아이러니’, 혹은 ‘반어’ 등의 단어로 설명되기도 하는 이 문법은 우리 삶에도 그 예가 많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반복하는 습관처럼.
그냥 길을 지나다 이 건물을 마주한다면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보는 관점에 따라 흥미롭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건물을 소개한다.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의 작업으로 이 사람은 예전부터 한국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로, 그라나다를 방문하는 김에 하나라도 더 보자 싶어서 들렀다.
사실 내부는 꽤나 개방적이라 마음만 먹는 다면 꽤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다. 우선 건물 앞의 광장을 마치 교회 건물처럼 굽어다 보는 두 개의 ‘가짜’ 타워가 인상적이다. 여기서 ‘가짜’라 함은 기능이 없이 높이와 모양만 맞췄기 때문이다. 정면의 입면이 대칭에 근거하지만 구석의 조그마한 창들이 균형을 흩트린다. 1층의 입구는 입구 양 옆의 창문보다 크기가 작다. 왠지 더 큰 창으로 건물의 규모에 맞는 대단한 입구가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가면 그의 특유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리석 마감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건축가를 상당한 ‘유머’를 겸비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너무 진지할 수 있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 않게 섞을 수 있는 너무 ‘부러운’ 균형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맨 꼭대기 층에 뒤쪽으로 접어 들어간 벽은 야바위 꾼같이 느껴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