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농익은 시선

by 베를린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지난날의 경험들로 돌이켜보면 낯선 장소에 몸이 적응하는 기간은 1달에서 3달 정도인 것 같다. 그 사이 예상치 못했던 잔병치레를 하기도 하고,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생소한 증상들이 몸에 나타나기도 한다. 몸이 외부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서서히 나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할 때, 그래서 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할 때, 그때 조금 더 친절하게 답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항상 다짐뿐이다. 날씨나 음식, 혹은 심적인 변화 등, 이래서 그런 걸까 저래서 그런 걸까 다양한 질문들을 통해 열심히 원인을 검색해 적응기간을 더 줄이려 한다. 그러나, '나는 급격하고 극적인 변화를 원래 좋아하는 것인가' 또는,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식의 나 스스로 무리스런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은 원망 섞인 후회도 한다.


마드리드의 가을 날씨는 적응하기 좀 쉬운 편이었던 것 같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겨울이 오기 전 한풀 꺾인 더위 위에 한없이 풍성해진 감성을 배경으로 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좋은 날씨는 한국이나 그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은 날씨에 쫓기는 일 없이 여유롭게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어느새 도심이 좁게 느껴졌다. 이제 조금씩 멀리 여행 다닐 준비가 필요했다. 일단 무리스럽지 않게,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장소부터 물색했다. 다행히 해가 길어서 시간적으로 쫓기지는 않았으나 만에 하나 중간에 교통편이 제대로 못 타면 어디선가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는 게 더 꺼림칙했기 때문에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준비해 상세하게 계획을 해야 했다. 당연히 첫 '중거리 여행'의 목적지는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의 최근 작업이었다.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1996년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prise)상을 받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이다. 80세가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물론 전성기 때에 비해 작품수도 줄고 성향도 조금씩 변화해가지만 아직도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무작정 일하러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때만 해도 아주 대강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떠한 건축을 하고 싶다 정도의 어렴풋한 테두리만 보일뿐 그것에 어떻게 다가가는지, 어디서 어떤 나침반을 구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런 것 말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건축물들을 책이나 인터넷, 혹은 직접 가서 보면서 '이 사람은 여기서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는 모네오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재미있었다. 이런 땅에, 이런 내용을 담은, 이런 건물을 내가 직접 작업한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신기하게도 책을 통해서, 답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조금씩 느끼고 경험하며 나도 그중 이것은 좋으니 나도 써먹어야지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답사가 필요했고 더 많은 예시가 필요했으며 더 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 했다.


첫 '중거리 여행'의 목표인 CDAN(Centro de Arte y Naturaleza)은 개인의 이름을 딴 재단에서 운영하는 전시시설이다. 사실 유사한 배경을 가진 전시시설은 세계 어디에서나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성공한' 예술가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에서 제반시설을 운영하는 광경은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모네오가 이런 소규모의 재단의 작업에 참여한다는 것에 왠지 나는 더 기대를 하게 됐다. 일단, '전시시설'이 아닌가! 건축가들의 꿈의 작업이자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전시시설'. 매일매일 일상의 배경이 되는 주거, 상업시설이나 업무시설 등과 다르게 '에이, 이 정도쯤 어때'라는 예외적인 상황도 용인될 것 같은, 마치 건물이 안에 담고 있는 예술처럼 예술을 담는 공간도 특별할 것 같은 문화시설이다. 거기에 심지어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평지에 나 홀로 서 있는 전시시설이라니, 조건만으로도 부러웠다.

CDAN (Centro de Arte y Naturaleza) Museo en Huesca / Rafael Moneo / 1997~2006 / ©HK Shin

유연한 곡선 형태의 벽을 따라 흐르는 그림자, 그 벽에 가로로 일정하게 새겨진 음각의 무늬들은 그림자를 더 돋보이게 한다. 여러 이웃과의 어울림을 따져야 하는 도심지에서 보다 확실히 가능성은 자유롭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풍경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던지 그 지역에서만 나는 재료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던지 등의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건축적 결정도 가능하다.


CDAN (Centro de Arte y Naturaleza) Museo en Huesca / Rafael Moneo / 1997~2006 / ©HK Shin

사실 내부 공간이 큰 편이 아니라 천창은 별로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곡선으로 흘러가는 벽들 사이에도 틈이 있어 측면으로도 빛이 들어오는 걸 감안하면 실내는 항상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카페 및 상점, 워크숍 및 작업실, 수장고 등 단순한 전시시설이 아닌 문화단지로서 골고루 기능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건축주 분이 상상한 그림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모네오의 건축은 스페인에서 제일 빛난다. 여러 문화유산과 시간의 켜들이 겹겹이 얽혀 있는 도시에서 더 빛을 발한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세련된 방법으로 현재의 것으로 다시 만들어 낸다. 시간과 대화한다. 그 장소에, 그 시간에 맞는 작품들이 나온다. 그 장소에만 어울리는 그의 농익은 시각이 건물로 녹아 나온다. 건물을 지어야 하는 장소 맞은편에, 바로 옆에, 혹은 근처에 몇 백 년 된 고건축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의 새로운 건물은 그 오래된 건물과 대화하려 애쓴다. 그래야 지난 시간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시대에 따라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 같은 이방인이 이 먼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듯이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 그럴듯한 이야깃거리가 없을 땐, 현대 건축의 거장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 잊힌 명곡을 근사한 편곡으로 새로이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이 건물처럼 아주 드물게 '자유로운' 주변 상황이 주어지면 자신만의 자유를 구현한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를 보고 어떤 평론가는 '여우'같다며 살짝 얍삽한 뉘앙스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이런 농익은 시선이 좋다. 약간의 세심함과 약간의 대범함과 약간의 얍삽함 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들이 교차로 떠오르는, 입체적인 시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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