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by 베를린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살면서 그런 순간들이 있다. 무심코 지나갔던 순간, 그냥 그렇게 잊어버렸던 순간, 일부러 잊어버리려 했던 순간들. 보통 이런 순간들은 시간 길이가 아주 짧아, 다른 순간 혹은 다른 느낌, 다른 감정들과 무질서하게 섞여 있곤 한다. 지난날의 사진에 기록된 순간을 보면 그 당시의 모든 것들이 살아난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커피를 내리듯 주변의 기억들도 되살아 난다. 더 시간이 지나면 예전 기억을 꺼내보는 것들도 힘들고 무뎌질 것이라는 생각에 이렇기 오래된 서고를 뒤지는 순간이 마지막이란 각오로, 때로는 비장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기도 하다.


대학 선배 Y가 있었다. 대학 시절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고 설계실을 같이 쓰기도 한 그는 나보다 2년 반 정도 먼저 스페인으로 떠났다. 약간 불도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힘든 상황은 정면 ‘파괴’해 버리는 인물이었다. 내가 마드리드에 갈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도착해서도 형의 존재는 참으로 고맙고 든든했다. 가끔씩 그와 만나 소주 대신 위스키를 마시며 삼겹살을 고추장에 푹 찍어먹는 것이 그때의 낙이었다. 그런 그도 여행을 참 많이 다녔는데, 그의 여행 스타일은 아주 ‘전투적’이었다. 그는 마드리드 근교 도시 똘레도(Toledo)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그곳이 높이차가 심하고 오르락내리락할 곳이 많아 여름엔 관광객들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쨍쨍한 여름에 배낭에 1,5리터 생수병을 세병씩 들고 다니며 구경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며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그 장소를 다녀온 뒤에 느낀 거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처한 상황 등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른 듯, 다른 것도 같은 듯 다가오곤 한다. 나는 더 일부러 설렁설렁 다니려 노력했다.


같은 장소를 겪은 다른 이들의 다양한 기록들은 지금도 재미있는 주제다. 비록 개인적이고 지극히 색다른 Y선배의 기록 같은 건 찾을 수 없어도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나도 그 다양한 기록 중 하나가 되기를 노력한다. 그럴수록 난 더 열심히 내가 지나온 마드리드의 시간들을 더 천천히, 더 열심히 곱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이야기를 할 똘레도와 세고비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보통 여행자들에게 이 두 도시는 마드리드 근교로 당일치기로 비행기나 기차로 이동 전 남는 시간에 방문하는 조연 같은 도시들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다녀왔다! 타야 할 비행기나 기차가 없었을 뿐, 취업고민도 해야 했고, 언어 공부도 해야 했고, 통장잔고도 걱정하고, 연애 걱정도 해야 하는, 누구보다 치열하지만 잔잔한 일상을 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급한 마음으로 기록된 시간이지만 꺼내보는 것이라도 차근차근, 천천히,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아른아른한 기억 너머로 주변의 시간들까지 꺼내 퍼즐을 완성해나가는 기분으로.




스페인에는 UNESCO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참 많다. 이탈리아와 문화유산 등재를 기록으로 비교한 기사를 어디서 본 것 같다. 이 정도로 옛 흔적이 잘 보존된 것은 아마도 2차 세계 대전이 스페인을 비껴갔기 때문일 것이다. 각 도시마다 구도심의 흔적들이 잘 남아있고 과거와 얽혀 사는 방식들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똘레도(Toledo) 역시 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유적이 공존하는 장소이며 무어인(Moors)들이 지금의 스페인 땅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을 때 수도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 때 황금기를 누렸던 도시의 향기가 거리 곳곳에서 느껴진다. 특히 거의 산악 지형과도 같은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대성당의 돌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불가사의할 뿐이다.


Toledo, Spain / ©HK Shin


스페인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무어인이 남기고 간 장식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스페인의 남부 대도시들의 대성당이나 시의 주요 시설 등은 더더욱 그렇다. 똘레도(Toledo)는 도시가 품고 있는 고저차를 극복한 흔적들 이외에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의 최고 유명인사 쎄르반테스(Cervantes) 동상의 배경에 남아있는 뾰족한 벽돌이 인상적이다. 당시 나는 일기에 “한국이었으면 현장 감독 아저씨한테 뺨 맞을 디테일“이라고 기록했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멋진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런 것만 보고 다녔었나.


Monumento a Miguel de Cervantes, Toledo, Spain / ©HK Shin




세고비아는 사실 '성'이 가장 유명하다. 그 성으로 각 위해 도시의 입구부터 도시의 가장 깊은 곳까지 차근차근 따라가야 한다. 로마인들의 웅장한 배수로가 도시의 입구로 상징적인 이곳은 왠지 아직도 로마인들의 흔적이 도시를 움직이는 것 같다. 기차와 버스가 번갈아 나를 데려다준 곳은 이 배수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상당한 높이를 차근차근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산 등성이에 다닥다닥 돌의 옷을 입고 달라붙어 있는 집들을 발견한다. 말 그대로 이렇게 시를 헤매는 것이, 그러는 도중에 발견하는 기막힌 도시의 풍경이 제일 멋지다.


Acueducto de Segovia, Segovia, Spain / ©HK Shin


도시의 입구, 도시의 중심가에 위치한 성당, 그리고 도시의 끝자락에 수로를 두르고 우뚝 서 있는 군주의 성. 만약 거기서 더 발달한 황금기를 맞는다면 인구폭발로 인해 성벽이 넓어지며 도시의 구조가 더 다양해질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몇 백 년 전의 도시 구조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형태일 것이다. 똘레도와 세고비아는 모두 후자의 도시들이다. 군주가 필요할 만큼의 성장을 이룬 도시. 이런 중소도시들은 유서 깊은 배경 때문에 인지 왠지 현재의 시간도 그곳에서는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내가 자잘한 고민 때문에 치열하게 살듯 그곳에 사는 이들도 그럴 텐데 말이다.


최근에 이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나는 서울성곽촌을 떠올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서울성곽촌에 대한 이야기는 외국에 있으면서 다큐멘터리로 알게 됐다. 전형적인 리액션, '서울에 저런 데가 있었어?' 그렇게 오래 살던 서울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게 지금도 참 부끄럽다.)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기가 막히는 풍경에 그 사이사이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시간부터 자리 잡은 일상의 풍경까지. 사실 그렇게 보면 멋진 풍경은, 내가 잡고 싶던 꿈의 일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Toledo 217.jpg

La Granja Escalators, Toledo, Spain

José Antonio Martínez Lapeña & Elías Torres / 2000 / Photo©HK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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