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부부-chicken
한국에서부터 구독하던 ‘엘 크로키’(El Croquis)라는 스페인 건축 잡지가 있었다. 대학교 시절 일주일마다 바리바리 각종 건축 책을 가지고 오시던 ‘책 아저씨’를 통해 근근이 전해 듣던 유럽 건축의 소식을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잡지사의 본사가 있는 곳은 유네스코 문화 유적으로 등재되어 있는 Monasterio y Sitio de El Escorial en Madrid, 스페인의 왕이 살던 거대한 궁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현재는 ‘엘 에스꼬리알’(El Escorial)이라고 부른다. 심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화려해서 둘러보는데 시간이 상당히 필요한 곳이다. 물론 나는 그 보다 잡지사를 먼저 떠올리긴 했지만.
기차역에서 내려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니 책의 맨 뒷장에서 보던 건물이 나타났다. 편집실, 전시 공간 등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이 잡지는 1년에 4권에서 5권 정도 발행을 하는데 주기적으로 스페인 건축에 대한 특집이 발간되곤 한다. 그리고 우연인지 마침 내가 갔던 그 시기에 전년도에 발행된 ‘스페인 건축 특집호’를 위해 각기 여러 다른 사무실들이 준비했던 모형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스페인 건축이 좋아서 온 사람에게 이리도 친절하게 예습을 시켜준다니. 마드리드에 올 준비를 하면서 찾아본 사무실들도 좀 있었고 아예 처음 보는 곳도 물론 있었다. 다양한 건축 언어를 구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작업을 직접 경험하거나 이렇게 전시의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은 항상 신나는 순간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개 작품들이 있다. 모형을 이리저리, 가까이서 멀리서 차근차근 둘러본다. 그리고 모형 밑에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는 사무실 이름과 작품명을 기록한다. 그중 가장 나의 생각과 잘 맞겠다 싶은 두 작품을 골라봤다. 나 혼자 너무 튀지 않게 주변의 이웃들과 잘 어울리고, 그 와중에도 스스로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한 사무실에서 한 작품이군. 이와 이렇게 된 거 나중에 포트폴리오를 보내볼까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아예 아니다 싶은 모형들을 몇 제외하고는 모두 기록을 했다. 나름대로의 시장조사였다.
그렇게 한참을 기웃기웃,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본다. 사무실은 어디쯤에 있고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몇이나 되며 어떤 작업들을 했고 하고 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꼼꼼하게 둘러본다. 그러다 아까 그 모형을 유심히 봤던 사무실의 홈페이지에 멈췄다. Estudio Barozzi Veiga, 짧게 EBV라고 쓰여있곤 했다. 젊은 사람들이다. 두 명의 소장 중 한 사람은 스페인 사람, 한 사람은 이태리 사람인데 이태리 사람은 나와 5살 차이다. 그런데 사무실은 바르셀로나에 있군. 일단 우선순위에서 미뤄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나는 바르셀로나로 이사 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 곳이 있을지, 나에게 맞는 곳은 어떤 곳인지를 계속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래, 말 그대로 ‘수소문’했다. 사전적 정의대로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두루 찾아 살폈다.’ 잡지, 전시, 혹은 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내가 가진 짧고 단편적인 지식을 현지화하는데 주력했다.
이 전시를 다녀온 것이 28살, 그리고 그 뒤 29살 30살을 지나 31살이 되는 2011년, 나는 그 바르셀로나 사무실에 도박하는 심정으로 향했다. 긴 기다림과 절박함 끝에 온 기회였지만 사실 구체적인 근무 조건도 없었고 임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도 없었다. 어차피 이미 그런 조건들에 대한 불신 섞인 나의 시선은 도리어 쿨하게 바르셀로나행을 재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는 이미 마드리드에서 2년 동안 건축에 너무 목말라 있던 차였다.
당시는 전혀 몰랐으나 후에 그곳, 바르셀로나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가 담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이제 곧 태어날 우리 아기의 고향, 베를린에서의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지금 차근차근 지나간 시간들을 곱씹어 봐도 신기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다. 한없이 단순한 순간부터 한없이 복잡하기만 한 순간들과 사건들까지. 누군가 그랬던가, 모두의 삶은 각기 다른 영화 같다고.
10년 전 그 날의 일과 사진을 뒤적거리며 28살의 나를 다시 회상해보는 지금, 삶은 너무나도 알 수 없기에 살아볼 만한 것 같다.
Hq. Ribera del Duero Roa, Spain / Barozzi Veiga / 2006-2011 / Photo©HK Shin
마드리드 근교의 ‘로아’ (Roa)라는 지역의 와인을 만드는 회사의 사옥이다. 건물은 아담한 언덕 베기에 자리 잡은 마을의 끝 경계선에 위치한다. 마을 쪽에서 봤을 때는 다른 이웃 건물처럼 아담하게 보이지만 위의 사진처럼 마을 바깥쪽에서 보면 높이차 때문에 앞의 건물이 상당히 높고 커 보인다. 이런 식으로 마을 내부와 외부에 따라 적절히,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게 계획한 것이 흥미롭다.
Auditorium Águilas, Spain / Barozzi Veiga / 2004-2011 / Photo©HK Shin
스페인 동남부, 무르시아(Murcia)와 말라가(Málaga) 사이의 해변가에 위치한, 아길라스(Águilas)라는 지역의 극장이다. 공공성격의 이 건물도 역시 뒤쪽의 이웃들과 어울리는 모습과 앞쪽의 바다와 어울리는 모습이 다르다. 바닷가 쪽으로는 큼직큼직한, 도시에서 보기 힘든 시원한 창들도 있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야외 테라스에, 무엇보다 바닷가를 닮은 곡선의 형태가 눈에 띈다. 그리고 지층에서 한 층 높은 입구로 사람들을 유입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계단과 램프도 만들었다. 그러나 반면에 뒤쪽의 이웃에게 짓고 잇는 표정은 심심할 정도로 무덤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