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이 매거진의 핵심이자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취업 도전기이다. ‘건축으로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할 기회가 필요했고 그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아야 했으며 그 대가로 나의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과정은 그 설명만큼이나 복잡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너무 많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심적인 파도가 날 잡아먹으려 했다.
사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첫 번째 취업 도전기 전에 ‘프리퀄’에 해당하는 0번째 이야기가 있었다.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할 때 무작정 전 세계에 겁도 없이 뿌린 몇백 부의 포트폴리오였다. 이땐 진짜 스스로의 오기가 발동해 인터넷에 지원 정보가 떠 있는 사무실은 모조리 보냈다. 집에서는 무한리필 잉크가 장착된 프린터가 하루 온종일 내 포트폴리오를 뱉어내고 있었고 나는 편지로 보낼 서신의 수신자만 바꿔 똑같은 내용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백개의 지원서의 결과는 3개의 인터뷰 문의와 2개의 불합격 통지서였다. 그리고 인터뷰의 결과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인턴으로 지원하는 줄 알았느니 하며 그들이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까다롭게 비자까지 내줘야 하는 외국인은 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싸구려 영화같이 지나간 프리퀄에 이어 3년여 만에 다시 제작된 1편은 촬영 장소만 바뀌었을 뿐 애매모호한 열린 결말의 또 다른 실패작이었다. 굳이 실패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정쩡하게 스스로 위로하는 건 더 슬프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포트폴리오를 돌리는 방식은 변함없었다. 대신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물량은 확 줄었다. 출력해서 보낸 건 30부 정도, 이메일은 100여 개였다. 사실 이 리듬은 내가 바르셀로나의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하기까지 2년 반 정도 계속되었다. 그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포트폴리오의 모든 언어를 영어에서 스페인어로 바꿨고 지원하는 이메일 및 편지도 모두 스페인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글의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았지만 알음알음 몇 명의 현지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굉장히 ‘현지화’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9년 6월, 드디어 마드리드의 사무실에 첫 면접이 잡혔다. 이 사무실은 브런치에도 언급했었던 el croquis란 스페인 잡지에서 처음 접했다. 그 뒤에도 계속된 나의 뒷조사에 의거 ‘상당히 흥미로운’ 사무실이란 판정을 내렸고 바로 포트폴리오 출력본과 ‘친애하는 담당자님께’로 시작하는 뻔하디 뻔한 편지를 우편으로 보냈다. 한 일주일 후 바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고 그렇게 처음 면접 자리에 섰다. 지난 나의 구직활동에 비추어 봤을 때 너무 빠르면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담당자는 포폴을 보는 둥 마는 둥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나에게 언제 일을 시작할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너무 뻔한 불나방 인턴 - 1권”에 나오는 매뉴얼대로 “당장!”이라고 답했다. 그때 나에게 사인하라고 한, 아쉽게도 근무 계약서가 아닌 종이가 한 장 있었는데 내용인즉슨, 사무실에서 본 내용을 밖에 발설하지 않는다와 수습기간은 6개월이며 이 기간은 무보수라는 것이었다. 당시 어학원을 다니면서 받은 비자의 기간이 좀 남아서 특별히 비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왠지 고용주에게 부담을 줄 것 같은 너무 '천사와 같은'마음이었다.
아무튼 가족들과 선후배 모두 말렸지만 오로지 나만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나의 무보수 봉사가 시작되었다. 근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시간은 2시간. 내 기억에 그 날 바로 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난 근무시간 내내 모형을 만들었다. 그래도 최첨단이어서 레이저 커터로 재료를 잘라 조립하는 식이었다. 난 그때 내가 항상 하던 데로 최대한 재료를 절약하고 못쓰는 재료가 생기지 않도록(전문용어로 기레빠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도 많이 쓸 뿐 아니라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를 신경 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도 나만의 세계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계에 몰두하고 있던 것이다.
난 6개월을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지나 정직원이 되리라 다짐했었다. 6개월 이란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일 뿐, 나를 6개월 동안 경험한다면 누구든지 나를 고용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모형을 만드는, 인건비 들어가지 않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사무실 분위기가 어쩐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직원들끼리도 잘 몰랐다. 왔다가 금방 떠나는 사람, 5개월까지 버틴 사람, 1개월 버틴 사람.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난 그냥 ‘모델실‘에 짱 박혀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애초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나 같은 인턴이 여러 명 있었다. 내 옆에 앉던 포르투갈에서 온 마누엘, 출근길에 종종 마주치던 슬로베니아에서 온 디아 등이 생각난다. 대부분 사람들이 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불평하며 떠났다. 심지어 내가 몇 달 그 사무실을 다니는 도중에 사무실은 시내 중심가의 좁고 기다란 사무실에서 그보다 위치는 조금 외곽이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창고 건물로 이사를 했다. 정말 덥고 습한 날이었는데 모두가 무보수로, 정말 열심히, 점심은 물론 각자 해결을 하고, 이사를 도왔다. 이삿짐 트럭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타고 다니며 짐을 날랐다. 누군지의 짐인지도 모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 그렇게 고생한 여러 사람의 노고의 흔적은 아무 곳에도 없다. 다들 어렴풋이 더운 날씨에 땀 흘린 기억 외엔 우리가 그 날 어떠한 수고를 했는지 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다를 것이란 기대가 나의 이성을 가로막은 것이다. 나는 아닐 것이란 우월감. 이것이 나의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은 것이다.
나는 그때 항상 시간에 쫓겼다. 무보수의 봉사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항상 피곤했다. 점심시간에 먹을 점심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 가서 밥을 해 먹고 사무실로 오던지 아님 도시락을 싸와야 했는데 그 전날 피곤하거나 하면 그다음 날 점심은 결국 걸렀다. 결국 4개월이 끝나고 5개월이 넘어가는 지점에, 그만뒀다. 역시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얼핏 건너 듣기로 사무실의 소장은 ‘그래도 인턴은 계속 올 것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지금의 홈페이지를 보니 사무실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을 가득 써 놨는데 분명 자신의 사무실이 무언가 대단한 사무실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리라. 심지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름도 없다. 그래도 뭐 이 시간 동안 스페인어는 많이 해서 말은 좀 늘었다. 그리고 이 인턴경력은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달고 다녔다.
근사한 사진만큼이나 과정도 근사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공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