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2년 8월 6일 연재
2019년 연말 이후, 꽤나 심한 감기 증상은 가족 모두에게 몇 번 있었다. 깊은 기침과 발열, 오한, 몸살 등등 일명 '코로나 증상'과 아주 유사한 경우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모두 아주 열심히 코를 찔러대며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다. 적어도 지지난 주 까지는.
현재까지 독일 전체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3천만 명이다. 전체 인구 8천3백만 명 중 36프로 정도에 해당되는 숫자이니, 적어도 서너 명 중 한 명은 이미 앓았던 셈이다. 코로나와 함께 벌써 세 번째 여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유난히도 더웠던 2019년 여름을 생각하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익숙해진 느낌이다. 아마도 그 방심을 뚫고, 느슨해진 마스크 사이로 우리 집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 같다.
최초 양성 확진을 받기 2주 전, 그날의 일상이 모두 기억날 정도의, 그래서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의 몸살감기를 앓았다. 여느 때와 같이 오후 미팅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뒤, 뒷허벅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서너 시간이 넘는 오랜 미팅 후라 '그냥 긴장감이 좀 풀려서 그런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긴가민가하는 불길한 증상을 가진채 집으로 도착한 지 30분, 불현듯 춥게 느껴지는 공기가 불안감으로 바뀌었고 이내 오한에 이빨을 덜덜덜 떨었다. 그 와중에 불현듯 불길한 생각을 머리를 스쳤다. ‘아, 이게 코로나구나.’
이후 며칠 동안 들어 누울 정도의 심한 몸살감기를 앓았지만, 계속되는 코로나 테스트 결과는 음성이었다. 불안감에 자체검사, 외부 검사 동시에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한, 발열에 식은땀이 계속 나고,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며,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도 심했다. 몸살이 한소끔 지나간 뒤 다음엔 두통이 어마어마하게 심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두통은 심박 소리에 맞춰 머리를 눌러댔다. 급한 맘에 이 약국, 저 약국을 다니며 '가장 센 약'만 찾아다녔다. 왠지 나은 것 같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감기를 달고 다니는 느낌은 지속되었다. 그저 그럴 때마다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파라세타몰 등을 번갈아 먹으며 버티는 정도였을 뿐, 검사 결과가 음성인 이상, 더 이상 특별한 조치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며칠이 지나며 다행히 '그냥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다시 감기 증상이 나타났다. 애매하게 살짝의 몸살기는 있었으나 약을 먹으면 괜찮은 듯 한 생각에 아스피린을 입에 털어놓고 여느 때와 같이 출근했고, 사무실에 들어서며 평상시처럼 자가테스트를 하려던 참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자가테스트를 ‘권유’한다.) 그때, 너무나 선명한 두줄에 여러 번 포장지를 확인했다. 순간 당혹감에 생각이 잠시 멈췄다. '어? 이게 뭐지?' 이게 진짜 양성인지, 오류인지, 아님 내가 뭘 잘못 본 건지 어리둥절했다. 일단 급하게 허겁지겁 마스크를 쓰고,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검사센터에 신속항원검사를 예약하고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보통은 검사 후 15분 뒤에 이메일로 검사 결과를 보내주는데 그날따라 20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서성이며 결과를 담은 이메일을 기다리는 그 사이, 오늘 밖에서 누구를 만난다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차저차 양성 결과가 나와서 정확한 검사를 위해 센터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어디 실내로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센터의 결과도 양성이었다. 그리곤 바로 PCR테스트를 받았다. PCR결과는 하루 후에 알 수 있고(뭐 사실 너무 자명해서 결과를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지만..) 자가 격리해야 한다고 아주 친절히 안내를 받았다. 나는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책상 위에 두고, 메일만 보낸 후 사무실에서 빠져나와야 했고, 아내는 급히 마트에 들러 양손 가득 장을 봐 왔다. 황급히 어린이 집에서 데려온 아이에겐 잘 알아듣도록 설명해야 했지만 그저 이 아이는 어린이집에 안 가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은 모양이었다.
작년 한국 방문에 14일 자가격리를 해봤던 경험인지, 아님 판데믹에 대한 경험치인지, 일단 잡다한 일들을 후다닥 처리했다. 먹을거리를 온라인으로 급하게 주문하고, 잡아 놨던 일정들을 조정했다. 양성 판정을 받으면 가정의에게 진단서를 발급받아 '병가'를 낼 수 있으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이틀 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택근무를 해야 했다. (심지어 코로나의 경우, 접촉에 의한 전파력이 강해, 유선 전화로도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세명의 식사를 위해 아내는 부엌에서 나오질 못했고, 그 사이 아이는 원 없이 미디어와 친하게 지냈다. 세 가족이 한 집에 산다는 이유로 함께 격리에 들어갔지만, 2022년 7월 기준, 사실 와이프는 모든 접종을 완료했기에 격리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엄격하게 따지면, 양성 판정을 받은 나와, 코로나 접종을 하지 못한 아이가 격리 대상이었다.
최초의 양성 판정에 기해 최선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급히 생각해봤다. 5일이 다 지나기 전에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의 건강도 회복되고 음성 판정도 받아 최대한 빨리 3명 모두 격리에서 해제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나리오다. 그다음 차선은 아예 셋 모두 비슷한 시기에 양성 판정을 받아 비슷하게 앓고, 회복하고, 음성 판정을 받아 셋 모두 한 번에 '완치 증명서'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한 사람씩 차례로 증상을 나타내며 양성 판정을 받아 한 사람 당 5일씩 총 15일 동안 집에 갇혀 지내는 것이다. 끝날만 하면 다시 갇히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지지리 궁상의 경우가 가장 슬픈 시나리오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집안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차라리 최대한 짧게 끝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와이프가 몸살감기 증상을 나타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다음 날 아이에게 미열 증상이 잠시 나타났다. 셋이 번갈아 가며 오락가락 증상을 나타내는 사이 하나둘씩 호전되고 시작했고 결국 나도 음성 결과를 받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검사에도 아내와 아이는 음성이었다. 그렇게 최초 확진자인 나는 5일이 꽉 차서야 집 밖으로 나가게 됐다. (신기하게 그쯤 되니 증상이 완화되고 음성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이틀 뒤, 와이프의 계속되는 깊은 기침에 나는 검사를 종용했고, 결국 와이프와 아이도 양성 판정을 받게 됐다. 우리 부부와 다르게 아이는 그 유명한 '무증상'이었다. 엄마가 검사를 받는 걸 보고는 떼쓰길래 같이 해본 결과가 양성이었다. 그러니 '우리 집 격리'의 결과는 차선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 중간 어디쯤이었다. 셋 다 모두 양성이었지만, 15일을 채운건 아니므로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한 걸로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그렇게 띄엄띄엄 2주 정도를 집에서 지내고 나니, 마스크를 더욱더 열심히 쓰고 싶어 진다.
올해 봄을 넘기면서 마스크에 대한 규제가 급격히 완화됐다. 현재 베를린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지속되는 곳은 대중교통뿐이다.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이 대체로 마스크를 잘 착용하는 편이지만, 내리자마자 마스크를 벗는 모습에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여러 장소를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닐 수 있으니 실효성에 의문이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올봄을 지나며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아진 것도, 접종 후 양성 확진에 대한 주변 경험에 대해 듣는 것도, 마스크 쓰기가 느슨해진 것과 너무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소식에도, 양성 확진자의 수가 그렇게 들쑥날쑥 늘어나도, 한 번 느슨해진 경각심은 깨우지 못한다. 한 공간에 오밀조밀 갇혀, 불같은 감정들을 서로 쏟은 다음에야 마음가짐에 대해 돌아본다.
이제는 어디서 어떻게 감염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슬기롭게, 어떻게 악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사실 판데믹 초반과 이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매하게 이렇게 앓고 난 다음에야 피부로 느낀다. 나의 방심으로 우리 집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순간, 아내와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