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2년 9월 3일 연재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느 다른 나라처럼 에어컨 없는 자동차는 독일 내에서도 이제 더 이상 보기 힘들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직 독일 내 대부분의 주거공간과 업무공간에는 에어컨 보급률이 낮다. 다른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과의 재미있는 잡담 중 하나가 에어컨이다. ‘날씨 참 덥죠’로 시작해서, ‘우와, 거기는 에어컨이 있어요?’라고 끝나는, 21세기 대화라고 믿기 힘들어지는 대화들을 무더운 여름이면 하루가 멀게 반복한다.
이제까지 한국보다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독일의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보다 북쪽에 있어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더 춥다는, 그야말로 ‘지정학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 온도는 국지적인 현상이 아닌, 세상 어딜 가나 마주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특별히 에어컨이 없어도 ‘아주 더운 건’ 고적 며칠에서 몇 주이니 그것만 견디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인드로 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혹서기 날씨’가 유례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래를 내다본듯한 독일의 혹서기 대비 대책들이 유난히 빛을 발한다. 내부 온도가 30도가 넘으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귀가해야 한다. (에어컨 있으면 집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특단의’ 냉방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사우나처럼 절절 끊는 더운 공기 속 아주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들이 온도를 낮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을 시 단체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저 대강 ‘냉장고에 사다 놓았으니 먹고 싶은 사람은 드세요.’가 아니라 전체 메일도 뿌리고 심지어 몇몇 사람은 들고 다니며 음악 듣느라, 무언가 집중하느라 몰랐던 사람들에게 굳이 아이스크림을 들이댄다.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간 이다음 단계는 35도다. 실내 온도가 35를 넘으면 ‘근무 불가’ 환경이라 정의한다. 그러니, 사측에서 이 온도를 제공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 에어컨이 없이, 모든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빛으로 데워진 35는 잘 내려가지 않는다. 그냥 앉아있어도 옷이 온몸에 끈적끈적 달라붙으며, 미간은 자주 찌푸려진다. 보통 이런 날씨는 아침부터 열심히 세상을 달궈 점심 전에 최고 온도를 찍는다. 사실 이런 날은, 점심 먹으러 밖으로 나가기도 싫다.
푹푹 찌는 이런 더운 날에는 점심 피크 시간임에도 거리가 한산하다. 아마도 대부분 '오늘의 날씨'를 예상하고 재택근무를 하거나, 부지런하게 도시락을 싸와 그늘막에서 식사를 하고 있겠지. 에어컨이 있는 상점은 여태껏 본 적도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듯하다. 보통 더운 날씨일수록 가게 밖 자리가 먼저 차는데, 아침부터 데워진 바깥공기는 밖의 자리부터 불쾌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런 날엔, 구석지고, 심지어는 지하에서 가까우 자리가 더 시원하다. 그렇게 더위를 피해 식사를 하노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저 후다닥 식사를 서두르고 더 시원한 실내로 피신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런 탈출구 없는 더위 탓에 각자 사무실에는 고유의 ‘더위 문화’가 있다. 우리 사무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온 문화가 있는데, ‘바로 한 해의 가장 더운 날 다 같이 먹고 마시고 집에 가는 문화’다. 보통 7월이나 8월의 하루가 당첨되는데, 이런 ‘한 해의 가장 더운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앞뒤로 며칠, 길게는 한두 주씩 푹푹 찌는 날씨가 지속된다. 소나기가 잠깐 내려도 그 순간뿐,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쬔다. 그러니 보통 무더위가 며칠씩 지속되면 아는 사람들은 으레 ‘이번 주가 아닐까’라고 짐작하게 된다. 장소는 베를린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Ristorante Sale e Tabacchi)이다. 이 레스토랑은 사무실에서 아주 오래전(1995-1996년) 실내 공사를 진행한 초기 인테리어 작업 중 하나로, 전반적으로 초기 완공 상태가 꽤나 잘 보존되어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버텨내 온 내공인지, 아직도 사람이 항상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곳도 역시 에어컨은 없다. 그저 시원하게 그늘진 뒷마당을 여름 고객들의 유혹 도구로 활용한다.
보통 점심시간 직후 전체 메일이 온다. ‘3시까지 잘레 타바키(Ristorante Sale e Tabacchi)로 전부 모일 것!’. 사실 워낙 더운 날씨에 대한 것이다 보니 강제성은 없다. 너무 더워서 그냥 집으로 가겠다는 사람도 물론 있고, 간단하게 시원한 화이트 와인만 한잔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 디저트까지 먹고, 후에 개인적으로 더 노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보통 본격적으로 저녁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 자리를 다 떠난다. 오후 한가한 시간에 우르르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몰려가 와인이니 간단한 애피타이저 정도를 먹는 셈이다. 특별한 음식을 주문하거나 하지는 않고 그저 주는 데로 먹고 마시며 두런두런 넋두리 및 잡담을 하며 평소에 못한 얘기들을 한다. 무언가 정형화된 틀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해의 가장 더운 날, 같은 장소에서 매년 한 번씩 모이니, 이것도 하나의 문화다.
에어컨에 대해 이렇게 투덜댔지만 사실 현재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금년 봄에 시작해 장장 한 달 넘게 진행된 공사는, 불편했지만 코로나로 인한 오랜 재택근무 후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기 싫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매일 35를 웃도는 후끈한 공기 속, 에어컨 바람을 쐐며 사무실에 앉아있노라면 와이프와 아이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그러나 방심은 무리, 이 사무실의 에어컨 설치에도 어마 무시하게 꼼꼼한 계획이 있다. 동쪽으로 창문이 있는 쪽 업무 공간에는 에어컨이 쿨하게 없다. 이유인즉슨, 동쪽으로 드는 햇살은 주로 오전 시간에만 내리쬐니 보통 하루의 가장 더운 시간인 오후 녁에는 시원하지 않느냐는 논리이다. 거꾸로 말해, 가장 뜨거운 시간에 오랫동안 햇살이 드는 서쪽 창이 있는 업무공간에만 에어컨이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에어컨이 설치된 첫 해부터 저쪽에 앉는 친구들이 아침햇살에 푹푹 익어가고 있다.
에어컨 설치에 이어 제빙기, 대용량 냉장고 등 금년에 이뤄진 결과들은 흡족하다. 물론 연신 굉음을 뿜어내는 가정용 제빙기는 80~90명이 함께 쓰기엔, 좀 역부족이다. 그래도 엄연히 있는 것과 없는 차이가 있으니, 저 기계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까지 부지런히 써줘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환경이 달라질수록(인정하기 싫지만 나아질수록) 더 이상 더위에 대한 '핑계'는 통할 길이 없어 보인다.
지난주 며칠에 걸쳐 몇 번씩 비가 오더니 금세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낮의 태양은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게 더운 고비는 넘어간 모양이다. (‘말복’이 지났으니 여름도 끝나간다는 생각을 하는 나는 한국사람이다.) 해가 유난히 긴 탓에 유독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여름은 이곳의 황금 계절이다. 그래도 더운 건 싫고, 여름은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