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끝 - 그녀와 그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무비자 불법체류의 아픔을 뒤로하고 도착한 서울에서의 누나 결혼식은 잘 끝나고 난 이제 1달여간의 서울에서의 휴가를 즐기면 됐다. 어차피 스페인에 다시 가져갈 서류들은 등록만 해 놓으면 시간이 걸리니 서류가 준비되는 몇 주 동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촌 영광통닭 가는 길 ©HK Shin


3년 만에 만난 서울의 모습을 최대한 뚜렷하게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 짧기도 짧고 길기도 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환경에서 있었던 탓인지 서울의 모든 풍경이 어색했다. 한국에선 아파트에서 쭉 살았던 내가 아파트 화장실의 낮은 천정고에 어색해했고, 시내버스의 높은 계단도, 고가도로가 마구 교차해 지나는 모습도, 청계천도 모든 게 어색했다. 물론 일주일 정도만에 아주 빠르게 현실감각은 회복됐지만 내가 어색해했던 그 시선들이 나에겐 아주 흥미로웠다. 익숙한 것들을 다른 시점으로 보는 첫 순간으로 기억한다.


신기하게 가족들이나 친구들과는 그런 어색함이 없었다. 어제 본 듯, 그저께 본 듯, 아주 익숙한 듯 편했다. 지나간, 미쳐 건네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할 이야기도 참 많았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가 바뀌면 나 자신의 모습도 조금 바뀐다. 말하는 게 모국어만큼 편하지 못하니 사소한 감정표현은 안 해버리기도 하고 알듯 모를듯한 고급 문장은 구사하기 어렵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래 할 말 다하고 따질 건 따져야 하는데 스페인에 있는 동안 그럴 상황도 안 됐고 그러기엔 일상도 너무 피곤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가 알지 못하던, 내 주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내가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음식에서도 나타난다.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은 다음날 피뽕을 동반한다. 즐겨먹던 음식을 안 먹어 버릇하니 ‘못 먹는 게’ 돼버린다.


그렇게 2013년의 여름은 나에겐 아주 특별한 여름이었다.

덥기도 참 더운 어느 여름 날 청계천 ©HK Shin


그리고 그 해 여름, 지금의 아내와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와 나는 2011년 바르셀로나의 교회에서 알게 됐다. (그리고 그때는 각자 연애를 하느라 바빠 서로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러던 그녀는 바르셀로나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고 그 뒤로 연락은 닿지 않았다. 그저 건너 건너 중간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렇다더라’ 정도 소식만 건네 들을 뿐이었다.

지인에게 건네듣길, 그녀는 서촌에서 스페인 음식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었다고 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만 해도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문득 궁금했다.


건너 건너 그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아내고 검색해 무작정 가게로 향했다. 더운 날 통인 시장을 지나 골목에 위치한 가게에 이르렀다. 우리는 어색하게 웬일이야, 여기서 뭐해를 연달아 이야기하며 인사를 나눴다. 거기서 커피 한 잔을 얻어마시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에 거길 갔는지, 왜 갔는지 나도 자세한 기억은 안 난다. 무슨 뻔뻔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가게를 한다니 ‘그럼 나도 한국에 들어와서 가게나 해볼까’하는 무지한 마음에 가본 것 같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삶의 스트레스는 일상의 행복감을 루팡처럼 잡아먹기 바빴고 그로 인한 불안감은 하루 이틀 잊고 지나면 다시 스멀스멀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건축’ 말고 내가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만 한 뒤 그녀는 3년이 지나 독일에 업무차 들르게 됐고 그 김에 우리는 두 번째 조우했다. 그 인연이 이어져 여기까지 왔으니 참 사람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사뭇 달랐지만 결혼관이 비슷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게 비슷했다. 당시 둘 다 삼십 대 후반으로 그냥 그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다. 볼 생각도 없던 영화를 장거리 비행기에서 우연히 보고 빠져드는 것처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포인트에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 뒤로 나는 이상한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사람 인연, 뭐 거기서 더 나가가면 내가 독일에 사는 것처럼, 세상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아 은근한 기대를 품고 사는 믿음 말이다. 때론 그런 예측하지 못한 ‘서프라이즈’로 인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이 “알 수 없음”이 좋다. 철없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은 기대. 오늘의 사소한 ‘예측불허’가 훗날 어마어마한 사건이 돼버리기도 하는 알 수 없음에 대한 기대말이다.


Kyobo Tower / Mario Botta / 1999-2003 ©HK Shin


keyword
이전 20화불법체류 22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