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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Dec 16. 2019

전혀 새롭지 않은 세대 간 "차이"

by 베를린 부부-chicken

베를린 필하모닉 메인홀. 무대 뒤쪽의 좌석은 눈이 조금 답답하지만 귀는 답답하지 않다.

몇 해전, 아는 지인의 추천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상임지휘자 사이몬 래틀(Simon Rattel)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관람한 적이 있다.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9번 교향곡인 데다가 상임지휘자가 이끄는 공연이어서 그런지 티켓은 진작에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다만, 공연 직전에 현장에서 취소 티켓을 판매하는데 운이 좋으면, 그리고 줄을 잘 서면 저렴한 가격에 이 행운의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 그렇게 난 그 공연이 얼마나 대단한 줄도 모른 체 현장판매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난 그 교향곡을 TV광고에서 봤음을 알아챘다. '아! 이게 그거구나!'. 현장에서 듣는 베토벤의 광기 어린 대곡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사실 평소에 이어폰이 아닌 이상 그렇게 크게 음악을 감상할 일도 잘 없거니와 클래식 음악이라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인 것을 생각하면 현장에서 접하는 생생한 음악은 나에게는 굉장한 감동이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 연주를 하는 사람들과 그 연주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집중하고 있는 관객들로 공연장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악장 사이 쉬는 시간에 바람을 쐬러 공연장을 벗어나 대기공간으로 나가보니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연장 구석구석에 앉아 있었는지, 새삼 북적북적한 사람 수를 보며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건물이 사뭇 대단하게 느껴진다. 1963년에 완공 이후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일 년에 거의 쉬는 날이 없이 그렇게 매일매일 크고 작은 공연들을 소화한다.


베를린 필하모닉홀을 설계한 건축가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 1893~1972)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의 한 명인 그의 건축세계를 들여다보며 난 항상 그가 살다 간 시대적 배경이 궁금했었다.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라인강의 기적까지 겪은 세대라서기보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에는 직접 참전도 했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일하던 시대 상황이 어땠을까가 궁금했다. 

이 책에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작업들에 대한 정보가 많다.

최근의 출판된 이 책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베를린 지역의 많은 주택 작업들이 소개됐다. 집합주택부터 단독주택, 별장 등까지 귀중한 자료들의 작업 연도를 보면 대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로 그는 이 시기에 정말 많은 작업들을 소화했다. 특히 나치가 유대인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1935년을 전후에도 그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30년 즈음 나치당이 본격적으로 독재체재에 시동을 걸 즈음 많은 독일의 학자들이 해외로 떠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일 출신의 건축가들도 미국으로 활동 배경을 옮긴 것이 이 시기이다.

다른 동료들이 떠난 시점에 그가 베를린에 남아있었다고 해서 의심의 실눈을 뜰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도시계획과 굵직굵직한 작업들을 다양하게 하게 되는데, 세계 대전 후의 전범재판들의 사례로 보아 어딘가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면 이렇게 큰 활동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끝까지 독일에 남아 전후 복구에 큰 작업들을 많이 했다.

Staatsbibliothek zu Berlin / Han Scharoun / 1967 ~ 1978

나치는 스스로 ‘제3제국’이라 칭하며 자신들이 로마제국,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에 이은 진정한 유럽의 후계자라 칭했다. 그래서 건축도 로마와 그리스의 흐름을 따라 고전주의 흐름을 따랐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전통성을 부여한다고 믿었다. 여느 분야처럼 건축도 돌고 돌지만 나치시대의 독일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큰 덩어리인지라, 인류 모두가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 분명한 선을 긋고 싶어 했고 샤로운도 그중 하나였다. 샤로운 건축의 자유로움이 이 부분에서 상당히 이해가 간다. 왜 샤로운의 건축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건축으로 옷을 입었는지. 그의 작업들에선 중심 공간, 위계질서, 대칭, 비례 등 고전주의 건축의 바탕이 되는 요소들을 볼 수 없다. 그에게는 고전주의와의 이별이 아니라 나치시대와의 이별이 먼저이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감히 해 본다. 이런 그의 결과물들은 후대에게 많은 흔적들과 교훈을 남겼다. 베를린 필하모니도 마찬가지다. 기존에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필하모니 홀은 그렇게 새로운 유형이 됐고 도시의 새로운 상징이 됐다.


나는 학생 시절, 이 시기의 건축이 전쟁이 끝나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한, 그림으로 치면 새하얀 바탕에 마음 편하게 ‘한 없이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댄 작업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큰 기회였을까? 아님 전쟁 후의 도시의 모습을, 삶의 모습을 인간답게 꾸려내기 위한 무거운 짐이었을까? 전쟁의 잔혹함을 본토에서 모두 겪은 그에게 전쟁 후의 경제적 붐은 과연 어떠한 의미였을까. 이제 앞으로 오지 않을, 우리는 겪지 못할 경제적 붐을 부러워해야 할까, 그래서 그렇게 많은 다작을 남긴 그를 부러워해야 할까, 아님 전쟁의 두려움을 겪지 않은 지금의 세대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어디선가 본 듯하기까지 한 세대 간의 시각 차이는 독일도 아주아주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의 30-40대의 젊은 건축가들이 마주한 상황이 그렇다. 베를린의 도심 곳곳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다. 지어도 지어도 집과 사무실은 불어나는 도심 인구를 받쳐주지 못하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값은 춤을 추며 이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많은 투자자들이 베를린으로 몰린다.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지어진다는 이야기는 많은 건축가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먹고 산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직장인'의 모습으로 열심히 세금을 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는 건축가들이 대부분이다. 샤로운과 같은 필하모닉 홀이나 주립 도서관등의 작업은 이미 몇십 년 전에 모든 것이 세워졌고 그나마 남은 몇 개의 작업들은 이미 기성세대, 특히 샤로운처럼 라인강의 기적을 젊게 경험한 '현재의 원로'들의 세상이다. 나도 세상을 최대한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바라보고자 하지만,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광기의 세계대전을 지나며 건축 작업을 해온 샤로운이나, 저성장 시대를 사는 지금의 우리들이나 각자의 어려움은 항상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감히 어떤 것이 어떻다고 정의 내릴 수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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