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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30. 2020

맨땅에 헤딩하기 : 해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

I have no idea with Budapest



동유럽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내가 아는 정보의 전부였다.

45일 유럽 일주의 종착지, 헝가리.

내 생애 점만한 비중도 차지하고 있지 않던 헝가리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부다페스트에 뿌리를 내리자'라고 마음먹게 된 순간부터 들었던 제일 1순위 생각은 - '어디서 살지? 우선 몸 누일 곳은 있어야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3대 기본 요소 '의식주' 중 가장 근본 되는 것,

‘먹고, 입고, 자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타지에 나오니 벌거숭이 된 기분으로 시작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살 집, 제3의 언어 , 가족(친구)과의 분리(나 혼자라는 기분), 어디 무인도에 내동댕이 쳐진 듯한 이 막연함.

'누가 내 궁뎅이(이 말로 표현해야 감긴다^^) 때려서 떠밀려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주어진 사명?을 짊어지고 신생아가 된 기분으로 처음부터 모두 다시 시작! 그렇게 헝가리란 '삶의 판'에 툭- 던져졌다.



'자.. 그럼 집을 알아볼까?'

6년 전 포털사이트엔 '이 도시'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전무후무 했다. (드물게 몇몇의 자료가 있었지만, 도움될만한 건 하나도 없었음)

'헝가리 집 구하기, 가격, 부다페스트 쉐어 하우스, 부다페스트 집, 부다페스트 유학생 정보' 등 어떤 키워드를 적어 넣어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너무 막막하다. 헝가리에 아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이 이곳에 뭘 공부하러 오는지도 모르겠고, 유학원은 있을 리 만무해 보이고, 어떤 검색어를 집어넣어야 내가 살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정말 아무것도 없네' (약 5-6년 사이, 헝가리에 주재원, 유학생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요즘은 꽤나 접근하기 쉬운 정보들이 많아지고 있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그것도 세계 곳곳에 한국인들이 손 뻗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헝가리 관련 정보만 박하네. ('내가 만약 이곳에서 살게 되면 '부다페스트 집 구하기'에 관한 것은 꼭 기록해두어야지..라고 생각했던 게 나도 6년 만에 내놓는다.)'




1. 첫 번째 집, 6구역 Rózsa utca(로저 우쩌)

2. 두 번째 집, 5구역 Báthory utca(바토리 우쩌)

3. 세 번째 집, 8구역 Fecske utca(페츠케 우쩌)

4. 한 달 살았던 최악의 집! - (이건 잊고 싶다)

5. 네 번째, 지금 나의 집, 6구역 Székely Bertalan utca(씨께이 베르떨런 우쩌)

*헝가리어로 ‘utca’는 영어의 ‘street’과 같은 개념이다.



지난 5년간 총 네 집을 거쳐왔다. 집 구하기에 대한 이야기가 각기 다른 또렷한 색채를 띄고 있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이다.






1. 첫 번째 집, 6구역 Rózsa utca(로저 우쩌)



이곳 생활을 하며 나에겐 유독 신앙의 간증 거리가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집이다.



6년 전, 아일랜드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또 접어두고, 유럽 일주를 계획하고 여행 중 만난 헝가리로 무작정 오고자 했을 때, '갈까, 말까'에 대해 이틀 밤낮을 고민해보고 바로 '부다페스트행' 티켓을 끊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생겨나지!'



표 끊기 전에 이모에게 전화를 하고, 표를 끊은 후에 이모와 다시 통화를 했다. 누구 하난 붙잡아야 쿵쾅거리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이모를! 이모, 고마워 ㅎㅎ 엄마에겐 다 정리되고 나서 알리려 했었다.)



"이모! 나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싶어. 한국으로 안 돌아갈래! 근데 너무 막연해. 어떡하지? 진짜 가도 될까? 꼭 살아보고 싶어. 지금 안 가면 평생 그 도시가 아른거릴 것 같아!"

"흥미진진해! 가봐. 혹시 아니, 살게 될 줄?"(우리 이모, 모험 선동자 ㅎㅎ)



이틀 후-



"표 끊었어! 아, 손 떨린다. 이제 어떡하지? 가서 살 집도 없고, 돈도 다 떨어져 가고..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야만 할 거 같아. 갈 테야. 그냥 가볼게!"

"아~ 나도 떨린다, 야! 이 도전 정신! 젊음! 내가 다 설레네. 나도 가보고 싶다!"(그저 신나 하는 우리 이모 ㅎㅎ)



무작정 표를 끊었지만, 더 이상 무작정일 순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살 집, 그곳에서의 삶의 방향, 사람들, 생활 전선 등을 책임져 줄 것이 아니었기에 남들은 설레면 그만이지만, 당사자인 난 살 떨리는 순간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했다.



45일가량의 유럽 여행은 나에게 일종의 '기도 여행'이었다.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갈급한 마음이 컸다.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첫 시작을 영국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2주를 묵고,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렇게 움직였다. 여행지 중 마지막 국가인 헝가리로 오기 직전, 체코 프라하에서 삶의 갈피(한국행 vs 아일랜드에 좀 더 거주)가 계속해서 잡히지 않음에 '혼자 읊조리며(기도)' 매 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 마치 '부다페스트'라는 신세계를 발견했을 때, 일종의 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흐르던 것을 기억한다. 이건 나만의 특별한 체험이라, 형용하는 것에 한계가 많지만, 마치 '이곳이야.. 네가 와야 할 곳이..' 하며 내 마음을 터치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다섯 밤을 이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지새우고 더블린(아일랜드)으로 돌아가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정석이었는데 도저히 이 도시가 전해준 마음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지금 가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살 것만 같았다. (난 '후회'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후회'할 짓도 잘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살면서 내 삶에 '아픔, 고통, 외면, 좌절'등의 단어는 있어도 '후회'는 거의 - 없다고 볼 수 있다.)



'오케이! 가보지, 뭐. 이미 난 계산해서 되는 사람이 아닌데, 이제 와서 무슨 수지타산을 따져. 가서 방법이 없다면 한국으로 가면 돼, 뭐. 헝가리 그 넓은 땅에 설마 이 한 몸 누일 곳이 없겠어?'하고 티켓을 끊은 것이다. 헝가리로 다시 간다니, 떨리지만 이건 설렘보단 두려움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여행과 삶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도 남을 경험을 했던 나다.)


이모와 정서적 공유를 하고 나니, 더 실감이 났다. '당장 가서 어디에 짐을 풀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모든 것에 기도로 시작을 하고, 끝을 맺어라. 물론 과정 가운데도, 늘'이란 것을 훈련시켜 주셨다. 그래서 난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열고 닫는, 밥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과를 보낸다. (이건 당연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넘어 숨 쉬는 것처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심정이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오. 마 4:4)


두려운 마음이 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기도를 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 일생일대의 것이 될 수도 있는데..'

엎드렸다. '하나님,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는데, 제게 보여주신 마음 맞는지요? 근데 저는 지금 겁이 나요. 이것이 제 아둔한 마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지...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정말 이 도시로 향하는 것이 제 욕심이라면, 그냥 다시 한번 여행하고 마는 것으로 그치게 해 주시고, 허락된 길이라면 열어주세요. 걸어갈 수 있도록.. 알기 쉽게 보여주세요. 살 집이 없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고, 의지할 이 하나 없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이 하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오직 주님, 하나님께서 방법과 길을 열어주세요. 가라는 만큼만 걸어가겠습니다. 대신 아니라고 하시면 과감히 접을 수 있는 마음도 허락해 주세요.'하고 밤 10시경에 표를 끊고 기도를 하고, 잠에 들었다.



아! 잠들기 전에 하나의 메일을 썼다. 헝가리 여행 중, 예배를 드렸던 '한인교회'의 목사님께..

기도 하던 중에 여행 때 다녀온 그 교회의 주보를 발견하고, 마침 목사님의 메일 주소가 있길래,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목사님, 저 기억하시나요? 여행 중 그곳에서 예배드렸던 'K'예요. 그 도시가 너무 마음에 남아, 무작정 티켓을 끊었습니다. 근데 가게 되면 지낼 곳도 없고, 뭐 민박이든 호스텔이든 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제 마음에 지금 두려움이 생겨나요.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가서 인사드릴게요"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사실 메일을 보내면서 어떤 기대를 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정말 '목사님의 기도'가 함께 있다면, 좀 더 안심이 되었기에... 보내고 나서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특이하네'하며 답장이 안 올 것까지 예상을 하고... 살짝 창피한 마음까지 들어 이불킥 한 번 하고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눈이 떠졌다. '곧 있음 난 헝가리로 가야 한다. 내가 지난밤 무슨 짓을 했지?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이미 한국으로 일찍 돌아가기 위해 변경한 티켓의 날짜가 지남)' 눈 뜨고 나니 지난밤의 무모함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실감이 났고, 그저 침착하고자 습관처럼 카톡, 메일 등을 확인하고 있었다.



응? 새로운 메일이 와있었다. 목사님의 메일이었다. ('와! 그래도 답을 주셨네. 그것만도 감사하다'하며 메일을 열었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소릴 질러서 옆방의 대만 룸메이트가 무슨 일이냐고 달려올 정도였으니.... 이건 흡사 '대학 합격' 통지 이상의 것이었다.



"K 자매, 기억나요. (난 여행 중, 교회를 가서 새신자 카드 기도제목에 '헝가리에 살고 싶습니다!'를 쓰고 제출해 교회 광고 시간에도 발표가 됐었다. 그땐 무슨 심정이었는지.. 평소 같으면 그런 카드 쓰지도 않는데.. 그땐 모든 것에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나다.) 마침 자매가 도착하는 날, 미국으로 잠시간 떠나 계시는 집사님이 한 분 있어요. 그 집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와서 연락 주세요. 기다릴게요. 환영합니다."



너무 눈물이 났고, 꿈만 같았다. 내 응석 같은 기도에서조차 하나님이 반응하시다니...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목사님의 빠른 답신 메일, '네가 오면 머물 집이 있다. 환영한다!' 이 두 마디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보다 확실한 응답을 허락해 주셨다.



(덧, 간증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단순히 '내가 기도해서 이런 것들이 얻어지고 이루어졌습니다'의 수준이 아닌데, 자칫 내 어설픈 글로 해석이 왜곡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이런 빠른 응답은 난생처음이었다. 살아가면서, 내 삶에 쉽게 주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기도를 해도, 금식을 해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녀도, 말씀을 읽어도.. 늘 돌고 돌아오는 것 같다, 라는 느낌으로 내게 필요하고 갈급했던 것들이 겨우 오거나 또는, 오지 않거나 그랬었다. 내가 바라던 것은 '깎여서 오기도 하고, 비어서 오기도 하고, 더 채워져서 오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에 맞는 가장 선한 방식'으로(결국 그게 가장 나에게 맞는 온전한 선물이었다) 그렇게 왔다. 연단의 과정으로 이끌어주신 건지,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더욱 기도하라고 하신 건지는 몰라도 내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중, 단번에 얻어진 건 맹세코, 하나도 없었다. 그랬기에, 위에 말한 메일의 내용이 정말 특별했고, 놀라웠다.)



그래서 간 첫 번째 집이 바로 한인교회 한 집사님 댁, 나의 첫 부다페스트 거주지(2014.6-7월. 두 달 머무른 곳)이다.

두 달 후, 난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2015년)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막연했지만 '새롭고, 감사하고, 특별했던' 나의 첫 번째 집]



Rosza utca_로저 우쩌 (로저는 한국어로 '장미'란 뜻)



그 당시 집, 스튜디오 형식의 방 & 거실, 뒤엔 복층 침대가 있다.   (천장이 높은, 헝가리식 집 내부)



집 앞 성당


집 앞, 버스 정류장



75번 버스-



* 75번 트롤리 버스(일명 전선 버스)는 나에게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기에 완벽한 장치이다.

집에 누워있으면 들리던 버스 오고 가는 소리, 그땐 홀로 낯선 곳에 있던지라 유독 모든 소리에 민감했다. 온갖 소리와 이글거리던 태양으로 기억되는 2014년, 여름.

75번 버스는 늘 승차권을 준비하고 탑승해야 한다. (부다페스트 95% 이상의 대중교통은 표 검사를 안 한다. 가끔 불심검문이 있다.),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 앞뒤로 나오는 특유의 사운드가 있는데 그게 날 이국적인 곳에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끔 해주었다. 이따금씩 이 버스를 탈 때면 6년 전, 호기심 어린 똘망한 눈빛으로 곳곳을 바라보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옥토곤 사거리_6년 전의 내가 바라본 '부다페스트' [이맘때쯤 관광객으로 난리 났었지]


2014_활기찬 Erzsébet tér, 에르지벳 띠르(엘리자베스 광장)



집 주변 풍경_2014







* 여기서 잠깐!
부다페스트는 총 2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부다(BUDA)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성북동, 평창동'과 같은 곳이고, 페스트(PEST) 지역은 '홍대, 이태원'으로 빗댈 수 있는 구역이다.
부다페스트 180만 명 되는 인구 중, 약 30만 명이 '부다'에, 약 150만 명이 '페스트'에 거주하고 있다.
젊은 층은 주로 페스트 지구에 거주하는 편이다. '놀고, 먹고, 누리고' 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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