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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y 04. 2021

오늘도 해피엔딩!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 10분 정도를 걸어 지하철을 타러 갔지만 집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업무용 노트북을 놓고 왔기 때문이다. 재택근무가 기본이라 출근을 앞둔 밤이면 언제나 노트북 가방을 현관 앞에 챙겨둔다. 북한산 자락에서 판교까지 출퇴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노트북을 잊어버리면 그 날 업무를 공치는 것과 다름없다. 중요한 걸 자주 깜빡하는 스스로를 잘 알아서 현관에다 챙겨놓는 것인데 어제는 무척 피곤한 바람에 노트북 가방을 책상 위에 둔 채로 잠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곱창 머리끈 같이 없어도 되는 잡동사니만 가방에 그득 담고는 노트북 가방은 깜깜히 잊어버리고 출근길에 오른 것이다. 회사 셔틀버스 정류소까지는 지하철로 20분, 다시 집에 다녀오려면 40분, 그러나 내게 남은 시간은 30분. 오늘은 안락한 셔틀버스 대신 한 시간 반을 꼬박 서서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해야만 했다. 꾸물꾸물 하늘에 드리우는 먹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아, 오늘 시작부터 불안하구먼.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려면 지하철로 40분을 간 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판교로 가는 빨간 버스를 40분 타야 한다. 빨간 버스는 경기권과 서울을 잇는 노선의 버스인데, 그 노선 인근에 살더라도 평생 단 한 번도 탈 일이 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주야장천 밥 먹듯이 타야 하는 이도 있다. 나는 전자에서 후자가 된 유형이다. 회사가 갑자기 판교로 이사를 간 덕에 빨간 버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덕분에 출근이 두 배로 하기 싫어졌다.


        인간 하나와 고양이 한 마리를 먹여 살리는 일의 고됨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속버스터미널 역의 출구로 나오는 순간 '그럼 그렇지' 싶었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우산은 챙겨 왔지만, 하필 오늘 가방은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한 천연가죽 숄더백이다. 온도와 습기에 약하니 비가 올 땐 주의해주세요, 온라인 쇼핑몰의 구매 시 확인사항에서 언뜻 읽었던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최대한 우산으로 비를 막으려 했지만 오늘의 날씨는 쉽게 막아지지는 않았다.


        빗방울에 진 얼룩이 돋보기를 댄 듯 내 눈에만 확대되어 보이는 가방을 흐린 눈으로 보며 자리에 앉았다. 운 좋게도 출근 시간대의 빨간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비의 습기를 방어하기 위해 버스 안은 에어컨이 빵빵했다. 비 냄새와 사람들의 숨과 에어컨 바람으로 퀴퀴한 공기가 가득했다. 자리에 앉은 천운을 감사히 여기며 책을 폈다. 임경선 작가님의 문장에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래,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업무를 위해 새로운 노트북을 받았다. 이럴 거면 왜 아침에 노트북을 가지러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왔으며 고된 대중교통 출근길을 거쳐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치밀었지만, 새로운 노트북을 받는다는 사실을 미처 챙기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까 봐 이 또한 저 멀리 던져버렸다. 새로운 노트북을 업무 환경으로 세팅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잘 잡히던 사내 와이파이가 뚝뚝 끊기고, 보안 프로그램은 갑자기 업데이트를 하고, 심지어 노트북이 변경되면 계정 권한을 다시 받아야 해 휴가 중인 팀장님에게 결제 요청까지 해야만 했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분석해야 할 엑셀 파일이 가득한데 싶어 조급 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샷 추가한 진한 아이스 라테도 들끓는 마음을 식혀주진 못했다.


        오전 내내 새로운 노트북과 씨름하고, 오후 내내 데이터를 정리하다 보니 금세 퇴근 시간이었다. 동료들이 하나  떠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늦은 출근으로 미처 하지 못한 잔업을 처리했다. 사무실 통유리 밖으로 어둑해지는 판교의 하늘을 보니 깜깜한 밤까지 홀로 집에서 나를 기다릴 고양이가 생각났다. 지친 심정에 미안한 마음까지 차곡차곡 쌓인다.




        한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잘해줘도 마지막에 소리를 지르면 끝이에요. 아이들은 그날 하루가 ‘화난 엄마 아빠’로만 남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웃어주세요.”

나는 아이가 아니지만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하루가 기분 좋은 일로 가득했어도, 마지막에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속상해진다면 그 날은 그저 속상한 하루일 뿐이다. 반대로 오늘처럼 잘 풀리지 않는 일의 연속에 지치고 속상하다고 해도, 마지막 기억이 즐겁다면 행복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 하루는 이전에도 많았을 것이고,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잘 풀리지 않아 쉽게 잊히는 하루를 만들기보단,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주어 해피엔딩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여러모로 나에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음악도 듣지 않고, 책도 펼치지 않고 창밖을 봤다. 해야 할 일, 혹여 실수하지 않았는지 미리 걱정하는 일, 미안한 일, 속상한 일은 접어두었다. 오늘 집으로 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개운하게 샤워하고 좋아하는 바디로션을 듬뿍 바르기. 고양이와 신나게 놀아주고 챱챱 간식 먹는 모습을 구경하기. 향이 좋았던 와인 한 잔을 곁에 두고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글을 한 편 쓰기.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 읽던 책을 펼쳐 마음에 드는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여 곱씹으며 읽기. 그래, 그럼 오늘도 무사히 해피엔딩이다.


# Cover Photo by freddie marriag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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