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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r 18. 2018

나의 아지트, 나의 작은 원목 책상

작가 지망생의 습작(習作) #6

※ 2018년 3월 17일 작성한 글입니다.

※ 커버 사진은 저의 아지트입니다.




 아지트는 사전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자주 어울려 모이는 장소’를 뜻한다. 

 ‘선거본부’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агитпу́нкт(아깃푼윽뜨)에서 가져온 말로, 원래는 공산당에서 근거지, 은신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단어의 의미와 유래를 조합해보면, 아지트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이 자주 모일 수 있도록 편안하고, 몸을 숨기기 적합할 정도로 안전해야 한다. 

 



 나는 자주 어울리는 무리가 있다. 

 대학교 시절 함께 동아리를 했던 선후배와 종종 모인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 장소에서 두 번 이상 모이지 않는다. 모두 사는 곳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북쪽에 가까운 곳에서 만나면, 다음번에는 서쪽에 가까운 곳에서 만나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 사는 곳을 배려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소위 ‘힙하다’고 표현되는 새롭고 개성 있는 곳을 찾아간다. 다들 그런 장소를 좋아한다. 이 무리는 아지트의 첫 번째 조건부터 충족하지 못한다.     


 속해있는 사교 모임이 많지 않아서 무리나 단체의 아지트를 생각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나의 아지트’로 생각을 좁혀보자. 나는 집에서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보낸다. 20살에 고향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다. 갓 독립하던 시절보다 가구며 옷이며, 짐이 많이 늘었다. 짐을 보관하기 쉬운 창고가 있는 조금 큰 평수의 오피스텔로 이사한 지 반년 정도 되었다. 평수가 조금 넓더라도, 방 한 칸짜리 오피스텔에 많은 가구를 넣기란 어려웠다. 책상은 과감히 포기했다. 일기는 밥상으로 사용하는 앉은뱅이 테이블이나, 혹은 침대에 엎드려서 썼다. 그 시기에 내 인생은 정말 무료했다. 일하고, 먹고, 놀지만, 마음에 큰 구멍이 있는 것처럼 허했다. 그때는 막연한 꿈만 있었다.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 무료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었다.     




 2017년 겨울, 책상을 샀다. 

 20대 후반을 맞이하기 전에 꿈을 위한 실질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열정이 넘치던 대학 시절,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국제적인 이슈를 다루는 잡지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이 생각났다. 도전해보고 싶었다. 대충 겉멋만 들어서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려면 대학 학부 전공부터 다시 해야 했다.     


 경영학을 공부한 나는, 경영학 전공자의 장점이자 허점이 ‘실용성’이라고 생각했다. 경영학은 ‘경영하는 방법’만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기업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공부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를 파고드는 경제학보다 좀 더 실무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 ‘왜?’보다는 ‘어떻게?’를 공부한다. 시장에서 무슨 제품을 팔아야 팔릴까?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을 충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많은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학부 시절부터 공부한 경영학 전공자의 채용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당장 쓸모 있는 인력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학점도 높고, 학회 활동을 통해 매주 컨설팅 프로젝트를 했던 나는 우수한 경영학 전공자였다. 하지만, 특정 이슈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칼럼니스트가 되기에 역량이 부족했다. 깊이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다는 ‘왜’를 파고들고 싶었다. 국제적인 칼럼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나만의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세계를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칼럼니스트를 많이 배출한, 국제법을 다루는 대학의 학부 전공에 편입을 결심했다.      


 편입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책상이 필요했다. 앉은뱅이 테이블은 오래 앉아있기 힘들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되, 문제집이 두세 권은 충분히 올라가는 적당한 크기의 책상이 필요했다. 여러 가구 사이트를 돌아다닌 끝에 꼭 맞는 물건을 찾았다. 원목의 따뜻한 색깔이 집에 있는 다른 가구와도 어울려 마음에 들었다. 직접 조립하는 제품이라 가격도 저렴했다. 책상이 배송 온 날에는 이미 시험에 합격이라도 한 듯 들떴다.  




 한창 일이 몰리는 시기였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를 웃돌았다. 그때부터 편입영어 책을 펼치고, 단어, 문법, 독해를 공부했다. 처음에는 넘치는 의욕을 주체 못 해 새벽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야근은 끝날 줄 모르고, 체력은 한계에 부딪혔다. 공부하려고 앉은 책상에서 나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였다. 시험은 붙는 게 이상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편입을 준비하는 건 불가능 아닐까, 퇴사밖에는 답이 없는 걸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나의 고민을 알고 있는 친한 언니가 조언했다.  

   

“일단 뭐라도 쓰기 시작하는 게 어때? 작은 것부터 하는 거야.”     


 그 후로 원목 색깔의 작은 책상 위에는 편입영어 문제집 대신, 노트와 펜이 자리 잡았다. 습작에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잘 쓰지 않던 노트북도 꺼냈다. 글쓰기 클래스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에세이 사이트에 기고했다. 남과 차별화할 수 있는 나만의 콘텐츠가 어떤 게 있을지 밤이 깊도록 고민했다. 글을 쓰고, 고치고, 또 쓰는 단순한 일이 이렇게나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줄지 미처 몰랐다. 작은 책상 위에서 열정이 다시금 솟아났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외출이 드문 나는 집에 있는 걸 즐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침대 위였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는 침대에 잘 눕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이 쓰고 싶으면 책상 앞에 앉는다. 작은 원목 책상을 앞에 두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안정되었다. 비로소 나만의 아지트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아지트에서 나의 꿈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지트에 앞으로도 더 자주, 더 오래 머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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