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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Oct 06. 2018

낯섦에 익숙해지는 것에 익숙해지기

나는 인생의 3분의 1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추리닝에 티셔츠 입고 운동화에 발을 끼운다. 

휴대폰과 이어폰, 체크카드 한 장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선다. 매번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는 내가 그곳에 익숙해지는 방법이다. 동네 산책하기.


단순히 바람만 쐬지는 않는다.

먼저,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적당한 규모의 마트와 가까운 편의점의 위치를 파악한다. 요즘은 잘 없지만, 시장이 있는 동네라면 더 좋다. 사람 구경 물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와 손 잡고 나온 무릎 높이밖에 자라지 않은 자그마한 아이, 잔뜩 배가 부른 아내를 부축하고 장을 보는 남자, 퇴근길인 듯 잔뜩 피로한 얼굴로 찬거리를 사는 직장인을 만날 수 있다. 그것뿐인가, 어디서 물건을 떼 오는지 궁금할 정도인 휘황찬란한 컬러의 몸빼바지부터 고무신을(얼마 전에 동네 시장에서 발견. 정말 놀랐다, 아직 고무신을 판다니..) 보기도 하고, 겨울에는 시장 입구에 위치한 붕어빵 트럭에서 향기가 솔솔 퍼지니 항상 가슴속에 삼천 원을 품어야 한다.


동네 카페에서 산 커피를 손에 들고 골목에 들어선다. 나와 같은 이방인이 아닌 그곳에 완전히 터를 잡은 사람들이 있는 곳. 살림의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골목길은 기억 속 나의 동네와 닮았다. 오래된 동네의 풍경은 어느 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전단지가 붙고 뜯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봇대와 그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보조 바퀴가 달린 네발자전거,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이층짜리 주택의 마당과 집주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작은 화단. 오래된 동네에는 꼭 하나쯤 있는 평상에 모여 앉아 드문드문 말을 주고받는 할머니들. 마치 그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양, 오후의 잔잔한 햇살을 즐기며 그 골목길을 걸어간다.


지난 주말, 동네와 친해지던 순간. 예쁜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27년을 살아오면서 두 번 정든 곳을 떠났다. 

부산으로 대학을 가면서 한 번, 서울로 취업을 하면서 또 한 번. 내 마음은 생각보다 여물지 못했는지 그때마다 심하게 향수병을 앓았다. 괜히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매일 밤 뜬 눈으로 지새우다 동틀무렵에야 겨우 지쳐 잠들면서도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든 곳에서 나를 다독여줄 가족과 친구들을 알면서도, 한 번 기대기 시작하면 혼자서는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아 애써 우울을 숨기기 바빴다. 부산에서는, 그래도 나와 같은 이방인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 서로 다독이며 지낼 수 있었다.


서울은 그렇지 못했다. 업무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고, 남자 친구와는 상경하자마자 이별했다. 서울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은 한 달을 넘지 못했다. 주말에는 전시회 투어를 다니겠다는 처음의 목표는 온데간데없고, 자고 또 자고 일어나도 잠이 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깊은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에게 어느 술자리에서 동기가 말했다.


"뭐 하러 힘든 거 끌어안고 있어. 주말에 커피 마시면서 동네 산책하고, 사람들 사는 거 구경하고. 그럼 좀 살만해."         


 그 후, 처음으로 내가 사는 곳을 마주했다. 비록 정든 이들은 없지만, 현재와 앞으로의 내가 숨 쉬고 살아가야 하는 낯선 동네.


처음 터를 잡았던 동네는 신촌이었다. 집 근처인 신촌 CGV에서 출발해 피아노 치는 예술가가 있는 현대 유플렉스 거리에서 커피를 사고, 그대로 따라 올라가면 연세대학교로 통하는 굴다리가 있다. 그곳을 지나쳐서 조금 외진 골목으로 걸어가면 작은 공원을 지나 보이는 이화여대. 가끔, 사람 붐비는 곳을 피하고 싶을 때는 골목을 다녔다. CGV를 등지고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주로 대학생들이 지내는 원룸촌, 그 사이로 가파르게 위치한 아스팔트 계단을 올라 조금 더 들어가면 흔한 프랜차이즈 커피 집도 찾아보기 힘든 조용한 주택가, 운동을 다니던 창천 스포츠센터와 나란히 서있는 창천 초등학교.




서울에 올라온 지 4년 차, 벌써 3번의 이사를 했다. 짐이 늘어 평수는 점점 넓어지고, 집세는 감당할 만한 곳을 찾다 보니 생각에도 없던 엉뚱한 동네로 오게됐다. 낯을 가리는 나는 낯선 동네를 마주할 때마다 곧잘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언제 또 낯선 이 곳에 익숙해지나.


그러나 나는 인생의 약 3분의 1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낯섦에 익숙해지는 것에 충분히 익숙해졌다. 내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추리닝에 운동화를 신고 낯선 이곳과 친해지기 위해 손을 내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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