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송이 May 06. 2020

시작을 알려주는 곳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부산에서 5년, 서울에서 5년째다. 부산에서는 타지에서 온 같은 처지의 친구가 많아 외로울 겨를이 없었지만, 직장을 위해 상경한 뒤는 달랐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 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때마다 낯설어 그런 것이라고 되새겼지만, 어떻게 해야 이 곳과 친해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첫 집은 신촌의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월세 70만 원에 6평이 채 안됐지만 회사가 가깝다는 장점이 컸다. 달 보며 출근하고 달 보며 퇴근하는 날만 반복되고 세련된 유흥과 문화생활로 꽉 찬 꿈꾸던 서울 라이프는 없었다.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들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게 유일한 위로였다. 14층에 위치한 오피스텔 창문으로는 창천동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스름한 주황색 가로등과 드문드문 켜진 주택의 형광등, 좁은 골목, 그 끝의 낡은 돌계단과 가끔 걸어가는 배낭 멘 작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직장에서 된통 깨진 날, 어설픈 정장에 까만 단화를 신고 퇴근하다가 문득 집에 가도 반겨줄 이가 없다는 사실이 유독 상처가 됐다. 그대로 창문 너머로 보던 좁은 골목을 걸어 배낭 멘 작은 사람이 오르던 낡은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널려있어 멀리서 봤을 때보다 낭만은 없었다. 그래도, 편안함을 주던 창천동 풍경의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게 그제야 실감 났다. 나는 여기, 서울에서 숨 쉬고 먹고 자고 일하며 살고 있었다. 이름 모를 곳에서 소리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깨졌을 때,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 산책이 하고 싶을 때. 가끔은 맥주 한 캔을 들고 돌계단을 찾았다. 그렇게 1년을 창천동에서 살았다.


많이도 찍어댔던 14층 창문 너머 바라 본 창천동


불광은 생소한 지명이었다. 안전하고 넓고 저렴한 꿈의 전세를 찾느라 지쳤을 때, ‘(예산 내의) 전세로 가고 싶다’는 말에 선배가 알려준 곳이었다. 역에서 가까운 원룸이 많고, 도심과 거리가 있지만 외지지는 않아 전세 값이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그곳에서 전세는 아니지만 전보다 훨씬 저렴한 월세에 좋은 방을 발견했다. 지체 없이 계약했다. 창천동에 이별을 고하고 두 번째 터, 불광에 왔다.


이사 첫날, 잠들기 전 창문을 닫는데 손에 뭔가 묻어 나왔다. 이전 세입자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기라도 했던 건지 창틀에 누런 때가 가득했다. 아이보리라고 생각했는데, 하얀색이었나 보다. 새벽 네 시까지 창틀을 닦았다. 울분을 억누르고 창틀을 닦다 보니, 갑자기 두려웠다. 낯선 곳에서 맞이한 첫 위기였기 때문일까. 욕이나 실컷 하고 치우면 될 일인데, 그 창문 너머로는 가로등의 주황빛과 주택의 형광등, 좁은 골목과 돌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왜 창천동을 떠나왔을까, 그곳에도 분명 좋은 집이 있었을 텐데. 쏟아지는 두려움을 애써 밀어내고 날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었다.


첫날의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라보기만 해서는 언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집 근처 대조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신촌과 달리 소위 토박이인 동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정겨웠다. 맞은 편의 NC백화점과 좀 더 걸어가면 한적한 주택가, 그 사이 양고기나 주꾸미를 파는 가게들. 동네와 인사하는 건 수월했지만, 불광의 낡은 돌계단을 발견한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지하철 불광역 7번 출구에는 ‘엉터리 집’이라는 고깃집이 있다. 30년의 역사를 가진 불광의 자랑이다. 삼겹살은 1인분에 13천 원, 2인분이 기본이고 주문하면 껍데기가 서비스로 나온다. 바람에 훈기가 드는 저녁이면 엉터리 집은 테라스를 연다.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간 어느 날에는 활짝 열린 테라스 쪽에 앉았다. 고기를 먹고 볶음밥을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아주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볶음밥? 언제 주문했어?”

“아까 주인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주인 할아버지는 가게 밖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친구 분과 나란히 담배를 피우며 껄껄 웃고 계셨다.

“어이구, 또 저런다. 잠깐만 있어, 바로 갖다 줄게?”

하며 떠나시는데, 오래 기다렸는데도 화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주문이 늦어도 그러려니, 누가 농땡이를 피워도 그러려니, 맛있게 먹고 기분이 좋은데 화날 이유가 없었다. 정말 바로 가져다주신 볶음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낡은 테이블과 의자, 때 묻은 벽이 예스럽고, 단골들의 적당히 왁자한 분위기가 좋았다.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오래된 동네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여기가 ‘우리 동네’에 오랫동안 더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삼쏘와 엉터리집의 저녁


올해로 불광에 온 지 4년 차다. 시장에는 단골 김치가게와 정육점, 닭강정 가게가 생겼다. 엉터리 집은 주인 할아버지가 작년 말에 세상을 떠나시고, 리모델링을 했다. 새 테이블과 의자로 단장한 그곳은 여전히 우리 동네의 자랑이다. 삼겹살 2인분에 껍데기가 없어 슬쩍 “껍데기는요?” 하면 깔깔 웃으며 “줘야지!” 하는 아주머니가 계시다. 퇴근길에는 여전히 북적거리는 풍경과 맛있는 냄새를 감상할 수 있다. 언제든 배가 허할 때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나와 같은 동네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곳에 있다. 


삶의 3분의 1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내가 새로운 터에 정 붙이고 그곳에 녹아드는 시작은 낡은 돌계단을, 혹은 엉터리 집을 찾는 것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곳이 있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된다. 그러니, 어느 새로운 곳에서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분명히 시작을 알려주는 곳이 있을 테니까. 

이전 06화 낯섦에 익숙해지는 것에 익숙해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