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 <혼불 4권> 리뷰
무엇을 바라봄에 있어서 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결국 나는 이 말이 그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말이다.
너무 과한것도 피해야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었고, 제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봐야겠다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어느 지역의 벽화마을이 인기를 끄니, 우리 동네도 한 번 해 보자는 식의 그런 과시성 사업들처럼 말이다.
공부란 것은 이를 닦는 것처럼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정신을 관리하는 것, 역사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근본이자 과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엇다.
침비니 교전비니 하는 노비의 종류도 알 수 있었고, 건축을 오랫동안 공부해 왔던 나지만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에 머물면서 먹고 자고 앉고 눕는 살림집을 지밀이라고 칭하는 것도 처음 알게되었다.
세세한 것까지 똑같진 않겠지만 실재하는 곳인 전북 김제시의 귀신사를 다시 한 번 가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예전에 귀신사를 방문했을 때 <혼불>의 이 구절들을 알고 있었다면 그 곳에 대한 감흥이 더 깊게 다가왔었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남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울한 분위기속에서 어른들의 이상한 노래소리와 딸랑 딸랑 거리는 조그마한 종 소리를 들으며 따라갔었던 상여, 그 때를 다시 회상해 볼 수도 있었다. 할머니, 어머니, 아내, 딸로 불리는 여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나 살아가는 동안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인생의 이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엇다.
향의 소리가 참 맑습니다. 향이 소리가 참 맑습니다. 라는 부분을 읽을 땐,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어떤 향내가 날까? 어떤 향의 소리가 들릴까 궁금했다. 적어도 인간의 향내이기를, 남의 귀를 괴롭히는 소리가 아니길 바래본다.
상례가 물질의 한계를 넘어, 고인의 정신을 수습하는 것이라는 말은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구순을 바라보고 계신 외할머니, 집안의 어르신들, 부모님 생각이 났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묘비명을 남긴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도 생각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당부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이름 석자는 못 남길지언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을 보내다 그 곳에 이르면 안될텐데 말이다. 어영부영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방을 꾸미는 한가지 방법에 대해서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간 내가 기록하고 담아왔던 사진들을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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