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의 강화와 나라의 기틀
예종은 조선의 역대임금 중 재위기간이 인종(9개월) 다음으로 짧은 왕이다. 재위기간이 14개월 (1468.9 ~ 1469.1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두어야 할 사건은 좀 있다. 예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언행들이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스물여섯에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남이를 역모죄로 몰아(남이의 옥) 벌을 주었고, 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를 재수정한 사관에게 벌(민수의 옥)을 주어 신구세력들을 견재하였다. 예종은 또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였다. 예종 1년 그의 나이 스물, 형옥을 맡은 관리들에게 전한 당부가 대표적이라고 책은 전한다. 옥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지체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인권보호에 대한 언행이었다. 그가 좀 더 재위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오히려 조카인 성종보다 더 성군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 할 수 없고, 다만 예종의 죽음에는 좀 석연치 않은 뭔가가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유교국가로서의 체계를 확립한 조선 제9대 왕 성종은, 작은아버지 예종이 훙어한 바로 당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래서 물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수렴청정 하면 일반적으로 드는 선입견이 있지만 이 당시의 수렴청정은 꼭 필요하면서도 절묘한 수렴청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수렴청정했던 세조의 부인이자 성종의 할머니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의 역할이 크다.
명장면 1. 성종에게는 좋은 할머니가 있었다.
명장면 2.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명장면 3. 왕권을 강화했다.
궐 밖의 군주로 불리는 한명회를 빠져나올 수 없는 적당한 구실로 견재하였고 언론을 활성화시켜 권력자들의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였다.
명장면 4. 유교국가로서의 체계를 확립했다.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하였다.
명장면 5. 중전을 폐하고 사사했다.
성종은 어린시절, 왕이었으되 왕이 아니었으며, 진짜 왕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최선을 다 하였으며 인내했다. 또한 왕이 된 후에도 할머니를 빼면 자신을 알아줄, 자신의 편이되줄 이도 많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다스리며 시대를 살았다. 그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서 였을까? 문 중심의 정치가 펼쳐지면서 과학기술분야는 정체되었고, 군사분야에서의 허점도 들어났지만 역사는 그를 도학군주,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으로 인식하며 칭송하고 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이런때 쓰이는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군-지금으로 비교해보자면 좋은 지도자, 리더-은 자기 자신이 어떤 자세로 어떻게 노력하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 나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생사를 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성종은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