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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들의 피난처

[책]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by 정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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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니 이 책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 책이 완전한 맺음을 하지 않았기에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한권의 박완서를 읽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시기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내가 반한 글귀들


어차피 나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아도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까 말까라는 묵계 같은 게 섭섭했을 뿐 나중에 빨갱이로 몰릴까 봐 두렵다는 생각은 그닥 심각하지 않았다. 도둑질에 죄의식이 없어지고부터 후환을 근신하는 것까지 배부른 수작으로 여겨졌다. 오로지 배고픈 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모조리 엄살이요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쳐 있었다. -임진강만은 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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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군대 때문도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짜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직한 세상에 꼼작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임진강만은 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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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엄마가 왠지 임진강 이남까지는 쉽게 수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비슷한 예감으로 이번에는 전세가 불리해진 정도지 또 서울을 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내준다고 해도 그 치하에서 견디어내는 것 못지않게 두려운 게, 가라는 피난 안 가고 남아서 무슨 짓을 했나 의심받고 추궁당하는 거였으니까. 가라고 말해주는 것도 괴로웠다. 그까짓 쭉정이들 이제 좀 그만 들까불리고 싶었다. -때로는 쭉정이도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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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 이 난리 통에도 돈벌이는 쌔고 쌨어.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야/ 그런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있으면 가르쳐 줘 봐. 난 할 수 있어/ 우리 나이가 이 최전방에서 제일 쉽게 빠질 수 있는 데가 어디겠니? 그렇지만 넌 못할걸. 네가 양공주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언니 누굴 놀릴 셈이야?/ 놀리는 게 아니라 못해서 못하는 거, 할수는 있는데 절대로 할수 없는 걸 빼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안 남아서 속이 상해서 그런다. -한여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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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빈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 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한여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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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고립이야말로 우리가 움츠러들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 게, 숙부네의 은밀한 보살핌 덕이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기 위해서도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라 안 죽어져서 할 수 없이 산다는 걸 온몸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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