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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담백 11화

소:담백 #여름 05 도토리묵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 번째 독백

by 버들

Chapter 10. 도토리묵


“딸-이리 좀 와봐. “


방안 깊게 파고드는 햇빛을 무시한 채 늘어지게 자고 싶은 주말 아침. 나를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불속 움직임은 최소화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가면 눈치 빠른 엄마는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얼른 나와 보라니까. 엄마 좀 도와줘. “

엄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이불을 거칠게 걷고는 문밖을 나선다.


“아 왜에,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에.”

퉁퉁거리는 발걸음으로 엄마 옆에 섰다.


‘해가 중천이다, 중천. 얼마나 더 잘래?’라며 철없는 딸내미의 등짝을 가볍게 내리친다. 그리곤 손에 쥐고 있던 주걱을 내게 건넨다


“이것 좀 주걱으로 저어줘. 눌어붙지 않게, 알았지?”

주걱을 건네받은 나는 고개를 쑥 빼어 냄비를 확인한다. 냄비 안에는 연갈색의 물이 찰랑이고 있다. 냄비 옆에 놓인 도토리가루 봉지, 소금, 참기름 등으로 추측해 보건대 오늘의 메뉴는 ‘도토리묵’ 일 것이다. 오늘도 쉽지 않겠군- 생각하며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려 불을 점화한다.


엄마는 도토리묵을 집에서 직접 쑨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것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5분 만에 뚝딱 완성되는 라면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마트에 가면 잘 포장된 도토리묵을 팔고 있는데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란 말인가. 볼멘소리가 튀어나오지만 엄마의 대답은 늘 같다.


’시판용과는 엄연히 맛이 다르다.’라고.


엄마의 말마따나 시판용과 다른, 정성 가득한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해선 도토리가루와 물이 필요하다. 두 가지 재료를 냄비에 넣은 뒤 적정한 비율(1:5 또는 1:6)로 섞어 준다. 감칠맛을 위해 소금도 약간 넣어준다. 이때 도토리가루가 뭉치지 않게 곱게 풀어주어야 한다. 가루가 고르게 풀어진 듯하면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뒤 레버를 최대치로 돌려준다.


냄비 전체에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면 주걱을 사용해 한 방향으로 저어준다. 이때, 냄비 바닥을 긁어내듯 훑어가며 저어주는 것이 중요한다. 자칫하다간 탄맛 나는 도토리묵을 만날 수도 있다.


한참을 젓다보면 주걱을 쥔 팔에 뻐근함이 느껴질 때가 오면 화력을 약하게 줄여준다. 적당한 점도가 되었다 생각되면 가스레인지 불을 완전히 끄고 들기름을 떨어 트려 준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곧이어 반찬그릇을 틀로 삼아 반죽을 붓는다. 시간이 지나 반죽이 적당히 굳었다면 틀에서 도토리묵을 분리시킨다.


보기 좋게 자른 도토리묵은 간장 양념과 함께 곁들여 먹거나, 상추와 양파 등과 함께 도토리묵무침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양념한 신김치, 채 썬 오이, 김가루, 통깨, 그리고 살얼음이 낀 냉면육수를 부어 만든 냉묵사발이 별미이다. 선풍기 바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무더위도, 시원한 냉묵사발 한입에 기세를 한수 접을 정도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냉묵사발은 여름이 오면 한 번은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때문에 엄마는 냉묵사발 1인분 분량의 도토리묵을 내 몫으로 남겨주곤 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날, 도토리묵을 쑤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에서 쉼 없이 반죽을 저어야 하는 일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편하게 사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집은 도토리묵을 쑨다.

가족들 모두에게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음식이기에 며칠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몇 끼 동안 식구들의 입이 즐거웠다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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