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여덟 번째 독백
하지, 여름 하에 이를 지. 여름이 도달한다는 뜻의 하지는 24 절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대게 6월 21일 또는 6월 22일 무렵을 칭한다. (참고로 2025년의 하지는 6월 21일이다.)
이 날은 태양이 가장 높이 뜨며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 부른 이도 없는데 이른 아침 한달음에 달려온 태양이 오후에는 꽤나 느릿한 걸음으로 퇴장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루가 더욱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베란다를 통해 거실 깊숙이 들어온 햇빛을 등지고 누워 뒹굴거리는 주말 오후. 분명 두 시간 전에 밥 한 공기를 해치웠는데 왠지 뱃속이 헛헛하다. 그런 손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할머니가 묻는다.
”하지감자 삶아줄까? “
하지감자.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여름이 제철인 감자로, 봄철에 심은 후 하지 즈음 수확하기 때문에 하지감자라고 한다. 수확하자마자 맛보는 제철감자는 그 맛이 좋지 않을 수 없다.
겉에 묻은 흙먼지를 흐르는 물에 씻어낸 하지감자는 팔팔 끓고 있는 찜기에 넣고 껍질 채 찐다. 완벽히 쪄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음에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고새를 못 참고 뚜껑을 열어본다. 찜기 뚜껑 속에 갇혀있던 수증기들이 파-하고 쏟아져 나온다.
”할머니, 감자 다 익었어?”
할머니는 수저통에 꼽혀있던 젓가락 하나를 꺼내어 감자에 찔러 넣는다.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젓가락이 쑥 들어간다. 속까지 포슬포슬 잘 익은 것이다. 그런데 몇몇 녀석들은 시간이 더 필요한 지 젓가락의 진입을 막아선다. 찜기 뚜껑을 덮으며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난 후 찜기 뚜껑을 열어보니,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한 감자의 겉면이 쩍쩍 갈라져 있다. 갈라진 틈으로 잘 익은 노란 알맹이가 보이는 걸 보니 젓가락으로 찔러보나 마나 이번엔 모두 다 잘 익었을 것이다.
하지감자를 맛있게 먹기 위해선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설탕과 소금, 어느 것을 찍어먹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사실 설탕과 소금 번갈아가면서 먹으면 되니 오래 고민할 사항은 아니다. 설탕은 설탕대로, 소금은 소금대로 하지감자의 감칠맛을 올려주니 취향 따라먹으면 그만이다.
첫 번째 선택은 설탕이다. 노란 단면에 새하얀 설탕을 콕 찍어낸 뒤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자, 포슬한 감자의 단면이 입안에서 바스러진다. 동시에 설탕의 거친 결정에 씹을 때마다 입 안에서 잘그락 소리가 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설탕이 녹으면서 입안 가득 단맛이 퍼지자 배시시 기분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다음은 소금과 함께할 차례이다. 마찬가지로 감자의 단면에 소금을 살짝 찍어 한입 맛본다. 짭짤한 소금의 맛이 혀끝에 닿자 찌르르한 느낌이 들며 구미를 당긴다. 아무래도 세 번째 선택은 소금이 될 듯싶다.
하지, 여름하에 이를 지. 긴 소매가 거추장스러워지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이 시작되면, 봄기운을 듬뿍 받고 자라난 하지감자가 세상의 빛을 본다. 봄철 내내 어두운 땅속에서 자란 탓인지 녀석들은 밝은 빛을 싫어한다. 빛을 받은 감자는 단단히 뿔이 났음을 알리듯, 머리 위에 싹을 틔우고 그 속에 독을 품는다.
투박한 외모와 달리 꽤 예민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베란다에 들여진 하지감자 한 박스는 빛줄기가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봉해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물론 우리 집에는 돌아서면 배고프다 울어대는 제비새끼와 같은 아이들이 여럿이었으니, 싹이 난 하지감자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근래에 SNS를 통해서 감자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를 볼 수 있다. 감자튀김과 감자전부터 에어프라이어를 활용한 으깬 감자구이와 해외에서 건너온 뇨끼까지. 모양도 수려하고 맛도 화려한 감자 요리가 이렇게 많다니….! 새삼 감탄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시작되고 마트에 하지감자가 진열되면, 포슬포슬 잘 쪄진 하지감자가 생각이 난다. 특별할 거 없는 소박한 모양이지만 손주들의 헛헛한 배를 채워주고픈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잘 삶아진 하지감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