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아홉 번째 독백
먼저 소신 발언 하나 하겠다. 나는 오이가 싫다. 후각을 자극하는 오이 특유의 풋내 때문이다. 하지만 김밥 속에 들어간 오이나, 비빔국수에 고명으로 올린 오이를 하나씩 골라내진 않는다. 아, 길게 자른 오이 스틱도 쌈장이나 고추장이 함께 한다면 문제없다. 이 정도면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아- 그렇다면 다시 정정하겠다. 나는 오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못 먹는 것은 아니다. 풋내를 풍기는 날 것 그대로의 오이를 먹는 건 조금 힘들지만, 양념을 곁들인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어디선가 오이 헤이터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여름이 시작되고 집안 곳곳에 선풍기가 등장하면 시원한 얼음을 둥둥 띄운 오이냉국이 생각난다. 아이러니한가? 사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조금은 머쓱하다. 이럴 거면 서두의 첫 문장을 몽땅 들어내야 하는 게 아닌지.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다. 생오이를 싫어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섭씨 30도가 넘어가는 기온에 가스레인지의 열기마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여름. 여름이 시작되면 우리 집 식탁에는 오이냉국이 자주 출현한다. 가스레인지 없이도 간단히 만들기 좋으며, 한가득 만들어 둔다면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 몇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국을 끓이는 것 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10년도 더 된 일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열대야가 반복되던 여름의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붙잡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한켠에는 언제 샀는지도 모를 오이 두개가 놓여 있었다. 문득 여름이 되면 엄마가 늘 해주시던 미역냉국이 생각났다. 주저없이 핸드폰을 들어 검색창에 오이냉국 레시피를 검색했다.
“뭐야, 별거 아니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미역을 추가한 오이냉국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적당히 불린 미역을 흐르는 물에 바락바락 씻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다. 채 썬 오이와 미역을 넓은 보울에 옮겨 담고 생수를 들이부었다. 다진 마늘, 소금, 국간장을 넣고 휘휘 저은 뒤 국물을 한입 맛본다.
“….?”
머릿 속에 물음표가 잔뜩 돌아다닌다. 소금과 국간장의 양이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손길로 매실청과 소금, 국간장을 추가했다. 국간장 때문인지 맑았던 물이 탁해지고 있었다. 각종 조미료를 추가하고 한 입 맛보기를 수 차례. 변하는 건 국물 색과 이를 바라보는 나의 얼굴 색 뿐이었다.
국간장물을 먹을 수 없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망해버린 오이미역냉국으로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나니, 잠이 드는 순간까지 오이 풋내가 코끝을 맴도는 듯 했다.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비로소 실패 원인을 알게 되었다.
첫째, 채 썬 오이는 소금에 절여 간을 배게 해야 한다는 것.
둘째, 국간장을 많이 넣게 되면 국물 색이 탁해지게 되니, 간은 소금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
그제야 제대로 된 레시피를 알았지만 그날 이후 오이냉국을 스스로 만드는 일은 없었다. 대신 시원한 오이냉국이 먹고 싶을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 뒤 부모님 댁에 가면 얼음 둥둥 띄운 시원한 오이냉국을 맛볼 수 있다.
식탁에 앉자마자 오이냉국의 국물을 꿀떡꿀떡 삼킨다. 시원하고 짭짤한 그리고 청양고추를 넣어 얼큰하기까지 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간다.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의 미풍과 시원한 오이냉국이 만나 뜨거운 날씨에 한껏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간다. 다음은 오이를 건져 한입 크게 머금는다. 아직 밥은 한수저도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 국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잘 먹네. 한 그릇 더 줄게. 더 먹어. “
맞은편에 앉은 엄마는 식사를 하다 말고 내 앞의 빈 그릇-불과 몇 분 전까지 오이냉국이 담겨있던-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이냉국이 다시 내 앞에 놓였다. 기분 탓일까? 왠지 아까 보다 양이 배로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어떤가. 이 기세론 두 그릇, 세 그릇도 문제없을 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엄마는 말없이 플라스틱 반찬통을 내게 내민다. 평소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딸에 대한 엄마의 걱정과 사랑을 오이냉국에 함께 담아 건넨다. 이 마음에 보답할 방법은 다음번에 깨끗하게 비워진 반찬통을 들고 오는 것이다.
“엄마!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라는 말도 잊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