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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5. 2019

다큐멘터리가 블랙코미디가 될 때

다큐멘터리 <앤서니 위너: 선거 이야기> 리뷰


<앤서니 위너: 선거 이야기> 봄. 신이시여. 이것이 정말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란 말입니까. 근래 본 다큐멘터리 중에 가장 재밌었다(funny의 의미다). 다큐멘터리는 앤서니 위너라는 미국 민주당 정치인의 2013년 뉴욕시장 선거운동을 다뤘다. 

앤서니 위너는 투쟁적으로 의정활동을 벌이며 인기를 끌던 촉망받는 하원의원이었다. 얼마나 촉망받았냐면, 그의 결혼식에 빌 클린턴이 주례를 섰을 정도다. 참고로 그의 아내는 힐러리 클린턴의 최측근 비서로서 '힐러리의 수양딸' 소리까지 듣던 후마 애버딘이다. 대충 감이 오는가? 하지만 그는 2011년 섹스팅(온라인 상에서 음란한 말이나 사진을 주고받는 것) 스캔들이 터지며 하원의원을 사임한다. 정치적 실패. 무료하게 지내던 그는 아내의 지지를 바탕으로 2013년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해 정치적 재기를 노린다. 

카메라가 앤서니 위너를 직접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한 건 출마 결정 직후다. 이 시점에 감독이 어떤 점에 흥미를 느끼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 실패한 정치인이 재기에 나선다'는 것이 애초 기획했을 시나리오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놀랍게도 앤서니 위너는 그의 탁월한 언변과 쇼맨십으로 민주당 뉴욕시장 경선에서 1위까지 올라간다. 그를 둘러싼 온갖 비난의 말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시점에서 감독은 충분히 땡 잡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나락까지 떨어진 정치인의 화려한 부활! 극적인 시나리오다.

그런데 작품 중반을 지나면서 위너의 선거운동을 일대 반전을 맞는다. 그가 섹스팅을 했던 게 2011년 적발된 건이 처음이 아니고, 그 외에도 여러 건 있었다는 폭로가 나온 거다. 심지어 그 중 하나는 사임 직후의 일이다! 섹스팅은 한 순간의 실수이고, 그 이후 아내에게 용서를 받았고, 나의 빛나는 아이디어로 다시 뉴욕시민에게 봉사하고 싶다며 출마한 앤서니 위너의 '진정성'은 일거에 조롱당한다. 이 시점에서 감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계를 타도 이렇게 타나 싶었을까? 

2차 폭로 이후 앤서니 위너는 추락한다. 멘탈적으로도 완전히 박살이 나서, MSNBC와의 생방송 인터뷰에서 앵커에게 폭언을 쏟아붓거나, 선거운동 차 들른 한 가게에서 유권자와 설전을 벌이는 게 촬영돼 인터넷에 오르는 둥 완전히 절제력을 잃은 모습을 보인다. 결국 경선 결과 꼴찌. 투표 직후 승복 연설에 나서는 장면이 재밌는데, 그와의 섹스팅을 폭로하고 전국의 주목을 받는 셀럽이 된 여성이 그의 승복 연설장에 찾아오는 컨셉의 방송을 찍은 것이다(...) 뭐랄까, 모든 것이 엔터테이닝이 되는 USA, 증말이지 상상초월이었다. (영화 <서치>에서도, 실종된 딸의 반 친구들이 '감성팔이' 영상을 찍어 유튜브 셀럽이 되는 걸 풍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의 셀럽-워너비와 엔터테이닝.)

앤서니 위너보다도 흥미로운 건 사실 후마 애버딘이다. 그는 1차 폭로 때는 카메라 앞에 나서지 않았으나, 2차 폭로 때는 기꺼이 카메라 앞에 나선다. 자기는 남편을 믿고 있으며, 중요한 건 그의 남편이 뉴욕을 위해 봉사할 적임자라고 연설한다. 그런 애버딘이 선거운동을 관두고 위너와 '한 장면'에 찍히는 걸 회피하게 되는 건 위너의 당선이 물 건너 갔음이 거의 확정적으로 보일 때쯤이다. 이 즈음 애버딘은 '필립'이라는 남자에게 지시를 받는 듯했는데, 아마도 힐러리 클린턴의 연락책일 것이다. 2016년 대선을 준비하는 힐러리 클린턴의 최측근이 추잡하게 실패한 정치인과 한 장면에 엮이는 것이 대권가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치적 판단이 내려졌다고 봐야 할까.

그나저나 선거 이후, 앤서니 위너는 폐인이 됐을까? 아니다. 그는 여러 방송에 열심히 불려다닌다(...) 이런저런 방송에서 그의 정치적 실패를 자조하는 농담들을 뱉으며 인기 있는 방송인으로 살아간다... 정말 미국이라는 나라는... 아무튼 <앤서니 위너: 선거 이야기>는 방송인이 된 앤서니 위너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다큐에는 나오지 않지만, 앤서니 위너는 2016년에도 또 한번 섹스팅을 폭로당해 결국 후마 애버딘과 이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큐 이후의 현실은 더 고약한 블랙코미디였다. 2016년 미국 대선 일주일 전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g메일로 이메일을 받았다는 건으로 FBI의 재수사를 받게 된 일 기억하는지? 그 재수사의 경로에도 앤서니 위너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 또 한번 섹스팅이 폭로당했을 때 이번에는 그 대상에 미성년자도 포함되었고, 이를 수사하기 위해 FBI가 그의 노트북을 압수했는데, 거기서 후마 애버딘이 관리하던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들을 발견한 거다. 이를 단서로 FBI는 재수사를 선언, 미국 대선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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