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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7. 2019

반유대주의자, 유대인 되다

다큐멘터리 <조용히 하라> 리뷰


<조용히 하라>, 넷플릭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 다큐멘터리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기차역에서 '아우슈비츠행' 기차표를 끊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둘의 사이는 어색해 보인다. 여성의 손목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표식이다. 잠시 남성과 홀로코스트의 정당성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남성은 유대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논조를 펼친다. 여성은 곧 질려버려 입을 닫는다.


그리고 과거 시점의 푸티지들로 돌아간다. 주인공은 세게디 처나드, 앞서 기차표를 끊은 헝가리 국적의 남성이다. 그의 나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신이 어떻게 반유대주의자가 됐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신념을 확산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2003년 즈음 함께 창당한 정당의 이름은 요빅당, 반유대주의에 기초한 극우주의로 무장한 정당이다.



처나드는 이 당에서도 2인자(부총재)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다. 그가 2인자까지 올라간 계기가 치명적이다. 그는 단지 정당 활동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껴 일종의 사병집단인 '헝가리 호위대'를 창시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헝가리 호위대는 나치의 철십자 표식과 유사한 표식을 달고 민간인들을 위협하는 행동들을 해대는 조직이다. 이것이 상당한 효과를 내서 요빅당은 단숨에 주류 정당이 된 것이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처나드는 유럽의회 의원직까지 당선되어, 유럽의회에서 반유대주의를 설파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잘 나가던 어느 날, 그가 고발된다. 고발명목이 놀랍다. 그의 할머니가 유대인이므로, 그 역시 유대인 혈통이라는 거다. (유대인은 모계 혈통을 따른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이 고발을 믿지 않는다.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키운 게 바로 할머니였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그래서 그는 할머니를 찾아가 진실을 묻는다. 그런데 할머니는 옷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찍힌 수감번호 문신을 보여준다. 할머니는 그 문신이 부끄러워 항상 긴팔을 입고 소매 단추를 채우고 다녔단다. 그래서 처나드는 그 문신을 못 봤던 거다.


처나드는 유대인 혈통이 맞았다. 혼란 속에 찾아간 당 동료는 오히려 잘 됐다며, 그걸 우리 당을 위한 방어장치로 쓰자는 제안을 한다. 이 말에 질려버린 처나드는 당을 탈당한다. 그리고 유대인 랍비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는 자기가 이 정치운동에 뛰어들 때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너무 빨리 정당의 중심으로 들어간 까닭에. 한편 그가 직접 만들었던 헝가리 호위대는 이제 그의 자택 근처에 찾아와 그를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위협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충격 속에서도 그는 곧장 반유대주의를 버리진 못한 듯하다. 랍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드문드문 반유대주의가 드러난다. 하지만 요빅당을 탈당하고 1년 동안 조금씩 변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1년째 되던 날 유대교의 의식인 할례를 받기에 이른다. 즉 탈당 이후 그는 '유대인이 되는' 과정에 매진한다.


그 1년 동안 그는 독일 베를린의 청소년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하고, 캐나다 유대인 공동체에 방문해 강의하려다 반유대주의를 이유로 입국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계속 유대인으로 편입되기 위해 시도한 건데, 그때마다 의심과 분노의 눈빛들이 돌아왔다. 당연하다. 그가 정말로 바뀌었는지 어떻게 확신하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는 유대인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을 서슴지 않던 자인데 말이다. 시종 그를 변호하는 그의 랍비조차도 카메라와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실망하는 일이 없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한다.


다시, 현재 시점의 기차 장면으로 돌아온다. 변해가고 있는 처나드와 아우슈비츠 생존자 여성은 아우슈비츠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여성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처나드는 경청하는 입장이다.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믿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간수가 재미 삼아 수감자들에게 총을 쏴댔다는 이야기를 들은 처나드가 수차례나 "정말이냐"고 물을 정도다. 사실 처나드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해주었던 말이다.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던 말, 하지만 서로 다른 생존자 두 사람의 증언은 놀랍도록 일치했다.


그는 정말로 바뀌었을까? 글쎄. 그조차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유대교에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가 바뀌는 것과 그를 용서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일 수도 있다. 그가 만든 당은 지금 헝가리의 제2당의 위치까지 올라있다. 여당 또한 노골적인 극우 정당이다. 그는 회개될지 몰라도 그가 망친 헝가리는 당분간 회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한 번쯤은 접해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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