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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09. 2019

'천조국'의 (무)책임과 인종문제

웨스트윙 시즌1 3화

웨스트윙의 실력을 본격적으로 내보이기 시작한 시즌1 3화는 대통령 개인비서로 흑인인 '찰리'를 고용하는 과정과 임기 첫 군사작전을 앞둔 바틀렛 정부의 혼란을 다뤘다. 에피소드 제목은 "적절한 반응." 참고 삼아 미리 적어두면 이 에피소드가 처음 방영된 날은 1999년 10월. 이 지점을 미리 알려두는 것은 2년 뒤 미국이 대대적인 '적절하지 않은 반응'으로 두 차례의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1.

흑인이고, 소년가장이 된 젊은 찰리를 대통령 개인비서로 고용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백인들인 바틀렛 정부의 관료들은 독특한 고민에 빠진다. "대통령의 개인비서로 흑인을 고용해도 괜찮은 걸까?" 처음에는 이 고민의 맥락을 오해하기 쉽다. 백인인 대통령의 가장 가까이에서 일할 사람을 흑인으로 고용해도 되겠냐는 인종차별인 걸까? 그래서 처음 조쉬에게서 이 고민을 들은 리오도 이렇게 간단하게 답변한다. "합참의장도 흑인인데 그게 뭐 어때서?" 



하지만 조쉬의 고민은 그런 맥락이 아니다. 개인비서는 대통령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가방도 대신 들어주고 그럴 텐데, 이런 '집사' 역할을 흑인에게 맡기는 것이 역으로 인종차별처럼 보이지 않겠냐는 거다. 백인은 '중요한 일'을 하고, 흑인은 '집안일'을 하는, 고전적인 인종차별 이미지에 대한 우려. 리오도 이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문제를 인식하게 됐는지, 합참의장인 피츠월러스(흑인이다)에게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피츠월러스는 간단하게 물어본다. 


"충분한 임금을 줄 건가요?" 
- 물론이죠. 
"그의 인격을 존중해줄 거죠?"
- "그래야죠."
"그럼 뭐가 문제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의 참된 의미를 피츠월러스는 정확하게 짚어낸 거다. 그렇게 찰리는 개인비서로 고용되고, 작품의 조연급으로 빠르게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해피엔딩.


2.

2화의 마지막에서 대통령이 아끼던 주치의가 탄 수송기가 시리아 정부로부터 공격당했다. 3화는 이 공격에 대한 보복 군사작전을 논의하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무엇이 적절한 보복인가'에 관한 갑론을박 과정이 흥미롭다.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부 및 관료들은 '관례적으로' 이러한 공격의 경우에는 송유관을 타격하고 주요 도로를 폭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제안하는데, 사적 감정에 사로잡힌 바틀렛은 "그 작전의 장점을 이야기해보라"고 쏘아붙인다. 여기에 대해 비서실장은 이렇게 답한다. "장점은 없고, 최선일 뿐입니다." 


이런 전략에 동의할 수 없었던 바틀렛은 막 객기를 부리고 부하들을 조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분노한 리오가 "자꾸 이럴 거면 아예 세계정복을 하지 그래? 그럼 안전해질 텐데 말이지. 하지만 그 전에 내가 군대를 조직해서 널 조져버릴 거야"라고 일갈하면서 잘 마무리되는 게 이야기의 흐름. 아무튼 이 '적절한 보복'이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다. '장점은 없고, 최선일 뿐'이라는 말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미국은 '천조국'이라 불리는데, 어마어마하게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이렇게 불리곤 한다. 사실상 미국의 군사력만으로도 세계를 지휘할 수 있는 수준. 



이런 미국이기에,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꽤 민감한 주제다. 가능한 만큼의 군사력을 동원하면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세계를 통치하는 미국의 정치적 명분이 흔들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군사력을 동원할 때는 '적절'한 수준을 면밀하게 따져서 세계의 균형을 위협하지 않을 만큼만 활용한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리버럴한 원칙이다. 그래서, 송유관을 타격하고 주요 도로를 폭격하는 것은 "장점은 없고, 최선일 뿐"이다.


하지만 역사 속의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이 에피소드로부터 2년이 흐른 뒤 9.11 테러가 일어났다. 여기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전쟁'이었다. 테러를 일으킨 단체를 숨겨준다는 이유로 한 국가를 궤멸시키기 위한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일으켰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미확인된 정보로 또한 한 국가를 궤멸시키기 위한 전쟁(이라크)을 일으켰다. 적절하지 않은 반응. '천조국'의 책임을 외면한 군사행동. 


그 결과는 어떤가. 아프간 전쟁은 아직까지도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고, 미군은 이라크에서 무력하게 철군했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적절하지 않았던 반응은 전쟁의 명분을 달성하진 못하고 단지 아프간과 이라크를 황폐화시키고 나아가 중동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만 성공했을 뿐이다. 이에 따른 연쇄작용으로 아프간과 이라크의 인민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공포 하에 놓이게 됐고(참고), IS가 창궐해 세력을 확장했으며(참고), 중동의 권력균형이 해체되면서 터키와 이란이 부상했다(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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