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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30. 2017

2010~2016 중앙대: 어떻게 싸웠나?

중앙대학교에 구조조정이 수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반대운동이 있었다. 매번 양상이 달랐다. 언젠가 정리해야지, 하고 한참 미뤄둔 주제. 또 뭔가 수작을 부린다기에, 이제야 간단하게 적어보는 것. 주관적인 인상들일 뿐 과학적인 얘기들은 아니라는 걸 미리. 적고 보니 꽤 길다.

-


1.

처음으로 구조조정이 실시된 것이 2010년. 이때는 학교도 굉장히 투박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뉘앙스 나쁜 말을 애써 다른 말로 포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살라미 전술 같은 걸 활용하지도 않았다. 본부 말마따나 "백지 위에서" 구조를 새로 짜는 계획이었다. 초안이 이랬다.


"독어독문·불어불문학과가 신설되는 노어노문학과 함께 유럽문화학부 아래에, 일어일문학과는 중국문화·인도문화학과 함께 아시아문화학부 아래에 ‘문화’라는 이름을 단 세부 전공으로 재편됐다. 가족복지·아동복지·청소년학과는 사회복지학부 아래 ‘인간발달·가족학’으로 재편됐고, 신문방송·광고홍보학과는 미디어홍보학부라는 이름 아래에 묶였다. 수학과 물리학이 수학물리학부라는 기묘한 이름 아래에 묶였고, 화학과 생물학이 또 한데 묶였다. 민속학과는 역사학과로 통폐합됐고, 가정교육·체육교육·정치외교학과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대신 국제물류·금융공학과 등 ‘돈이 되는’ 학과들이 신설됐다." (<중앙문화> 64호, '구조조정은 오래 지속된다')


노골적으로 인문대, 자연대, 정경대를 박살내고 경영대, 공대를 키우는 것이었다. 당시 총학생회는 강성 운동권이었고, (꼭 그래서만도 아니겠지만) 곧장 투쟁에 돌입했다. 그해 3월부터 4월까지 내내 투쟁국면이었다. 결과적으로 투쟁은 승리했고 또 패배했다. 당초 계획을 후퇴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한부였고, 무엇보다 학생들간의 분열이 지나치게 가시화돼 향후 운동지형이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생들은 왜 분열했을까. 학교의 전략이 교묘했다. 총학생회라는 중앙 창구로 교섭을 단일화하지 않고, 학과 단위로 협의를 진행했다. 해당 학과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을 일정 철회하는 대신 학생회를 투쟁에서 빼내라고 학과 교수들을 포섭했고, 학과 교수들은 학생회장을 종용했다. 그렇게 조금씩 비상대책위원회가 쪼그라들었다. 종국에는 독문,불문,일문 세 학과와 총학생회, 인문대, 정경대, 그리고 종용에 응하지 않은 일부 학생회만이 투쟁에 남았다. 


또 학교본부의 노골적인 푸쉬를 받은 경영대, 공대 내 학생들은 본부에 의해 통제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구조조정은 학생들에게 좋은 것'이라는 논리를 열심히 확산시켰다. 학교 대 학생의 구도로 전개돼야 할 투쟁은 어느새 구조조정의 수혜를 받는 학생들 대 피해를 입는 학생들의 구도로 재구성돼 있었다. 여기에는 두산 이전까지 중앙대 재단이 '식물재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는 경험도 강력하게 역할했을 것이다. 법정 최소 전입금인 1000원만 낸다고 천원재단 소리를 듣던 수림재단과 '학교 발전'을 부르짖으며 거침없이 투자하는 대기업 두산재단의 극명한 대비는 여러모로 학생들 사이를 가르고 찢어버렸다.


이러한 이유들과 더불어 당시 비상대책위원회의 한강대교, 크레인 고공농성 등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투쟁방식들은 (그것이 옳건 그르건) 학생들에게 운동권에 대한 아주 나쁜 기억을 남기게 했다. 결국 2010년 이후 중앙대에서 '운동권'은 저주받은 이름이 됐고, 인문대는 '걸핏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독종 단과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

2010년에 지독한 몸살을 앓자 학교본부는 이후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피했다. 대신 일부 학과에 한정해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2011년에는 가정교육과를 폐지시킨 데 이어 2013년에는 비교민속학과, 아동복지학과, 청소년학과, 가족복지학과를 폐지시키는 계획을 내놨다. 이 네 개 학과는 2010년 당시 이미 폐지대상이었으나 투쟁과 협상 끝에 '학부 내 전공'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그때 못한 정리를 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2010년에 비해 구조조정의 논리가 달라진 것도 아니었으나 캠퍼스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해당 학과들과 인문대 학생회, 그리고 사회과학대 소속 일부 학과 학생회를 제외하면 이 일에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총학생회는 물론이고 세 개 학과가 소속된 사회과학대 학생회조차 생색만 낼 뿐 반대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일부 학생들'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힘이 충분치 못했다.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총장실을 점거하는 등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학생들이 받쳐주지 않는 투쟁은 아무래도 힘도 명분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투쟁이었지만, 그래도 규모가 작은 만큼 결집력은 강했다. 서로간의 유대가 끈끈했다. 플래시몹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기도 했고, 이때 함께 농성하며 관계를 만든 학우들은 이 다음 학기 '안녕들 하십니까' 국면과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때 기꺼이 큰 힘이 돼주었다. 이러한 '주체의 재생산'은 2010년과 2015년에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이었다.


3.

'일부 학생들'의 일로만 치부했던 구조조정이 실은 어떤 시대적 흐름이고, 이를 피해갈 수 있는 학과는 없다는 사실은 2년 뒤인 2015년에 증명됐다. 이제 학교본부는 구조조정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이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만들어 가져왔다.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학과제 폐지. 학과라는 벽을 허물어 21세기형 통섭을 이루겠다, 뭐 그런 취지였다. 특정 단과대 특정 학과가 아니라 모든 학과에 해당하는 얘기였기 때문에 학교는 단숨에 뒤집어졌다.


2015년은 교수협의회의 투쟁이 특히 강력했다. 온갖 방식으로 반대활동을 펼쳤다. 매일같이 각 단위별 반대 성명서를 내고, 학생들 참여를 북돋우는 기획도 하고, 교수 총투표를 실시하고, 꾸준히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논리를 박살내는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했다. 특히 3월26일, 교협이 정문 앞에서 개최한 야외 토론회는 선진화 계획 발표 한 달 만에 열린 첫 오프라인 공론장이었다. 여기에 학생 단위도 합을 맞췄다. 캠퍼스를 반대 대자보로 뒤덮었고, 중앙마루에서 토론회를 열고, 설명회에 몰려가 학교본부를 성토하고, 인문대는 적어도 내가 입학한 이후로는 처음 단과대 총회까지 열었다. 


유일하게 차분(?)했던 건 놀랍게도 총학생회였다. 아니, 차분함을 넘어서 도대체 얘네가 누구 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학생들의 여론을 모아내는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뜬금없이 '선진화 계획 찬반 총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안을 내놨다. 갑툭튀인데다 무슨 '투표 전날까지 확정되는 계획안'이 투표대상이라는 둥 형식적으로 엉망진창인 안이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괜찮다. 총투표안을 공고한 다음 날 난데없이 교수협의회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선진화 계획이 학교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도 담겨 있었다. 심지어 이 성명서는 학교본부와 비밀리에 조율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샀다. 관련 내용은 잠망경 보도(https://goo.gl/ZsDl5H)를 참고. 비상한 상황이었음에도 학생총회는커녕 전학대회도 열지 않았다. 전학대회는 4월 말에나 열렸다.


총학이 이 모양으로 굴어대니, 학생들은 구심점을 잃고 제각각으로 반대운동을 펼쳤다.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긴 했다. 좀 웃긴 일이지만, 사회학과, 정치국제학과 학생회가 중심이 돼 단과대 학생회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자연대, 인문대 학생회도 포함됐다. 후에 인문대 학생회는 공대위를 탈퇴,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 비화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공대위는 대표성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는 단체였다. 선진화 계획을 둘러싼 학내 구도는 학교본부, 교수협의회, 학생 공대위, 총학생회로 사분할됐다.


반대가 거세자 학교본부는 일단 물러섰다. "학부/학과의 틀을 유지"하는 대신 신입생은 단과대 단위로 광역모집하고, 세부 논의를 교협과 총학이 참여하는 협의체에서 논의하겠다는 수정안을 낸 것이다. '학부/학과의 틀을 유지'한다는 것에서는 진전이었지만, 여전히 그 내용이 모호했다. 하지만 학교본부가 수정안을 발표하자 반대운동은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미 정치적 대표성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버린 총학생회가 협의체에 들어가는 것은 학생들 입장에서 용납해선 안 될 일이었지만, 더 이상의 반대는 없었다. 어설프게 합의된 '광역화 모집안'의 결함은 이듬해인 2016년 여실히 드러났다. 2015년에 운동을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사태는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박범훈 전 총장의 비리 혐의로 학교에 압수수색이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박용성 이사장의 막말 이메일이 폭로되면서다. 이 폭풍같은 흐름 속에서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 논의는 관심을 잃어갔고, 계획은 박용성의 사퇴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4.

나는 아직도 2015년에 학생들이 빠르게 관심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쉽다. 정치적으로 정말 많은 걸 해낼 수 있었던 국면이었다. 이때 학교본부 멋대로 뭘 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결과로 학교본부는 2016년에는 프라임 사업을, 그리고 올해는 또 무슨 '전공개방모집제도'(https://goo.gl/CZRGFY)이니 하는 수작을 부리고 있다. 


2016년 프라임 사업 추진 국면은 다소 시시했다. 학교본부가 또 일방적으로 프라임 사업을 추진했고,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워낙 짧은 기간이라 구체적인 반대운동은 별로 없었다. 단과대 학생회들은 내부적으로 설명회를 조직했고, 대자보가 조금 부착됐으며, 일부 학생회는 '합의한 적 없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사실 이때는 프라임 사업뿐만 아니라 광역화 모집의 폐해가 좀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시기였다. 학생회들은 신입생의 고충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였고, 이런저런 피켓시위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

일단 여기까지. 2016년은 내가 구차한 학기를 다니며 학교 일에 서서히 관심을 떼어가던 시기라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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