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야고보, 신성한 계보

38/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스페인북부와 포르투갈편-9)

by 이경석

신약성서에는 잘 알다시피 3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먼저 세배대(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다. 다른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대(大) 야고보라 불린다. 예수 제자 중 최초 순교자이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묻혔다고 지금까지 이야기해왔던 성 야고보가 이분이다. 예수의 12제자 중에 다른 야고보도 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다. 소(小) 야고보라 불린다.


그리고 제자는 아니지만 또 다른 야고보가 나온다. 의인 야고보 혹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불리는 제3의 야고보다.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동정녀였다는 교리에 따라 예수는 다른 형제가 없다고 가르친다. 당연히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의 사촌동생 쯤으로 해석한다. 또한 성서에 거의 활동이 적시되지 않은 소(小)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본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최후의 만찬에 예수와 소(小) 야고보의 얼굴을 서로 닮게 그려넣었다.


최후의 만찬-1.JPG (사진6-28. 다빈치 作 <최후의 만찬>,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아 성당, 예수 오른쪽 인물이 소 야고보 ©이경석 촬영)


어쨌거나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이후 12제자는 흩어져 각자 교회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열두 지파를 총괄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수장은 베드로가 아닌, 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도마복음에서도 예수는 자신의 후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형제, 야고보라 단언한다. 당시 중근동의 관습상 종교 제사장의 권위는 혈육으로 승계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게 된 것도 이 원칙에 대한 견해차였다는 건 요르단편 <제12화> 참고)


그런데 갑자기 듣보잡이 하나 나타난다. 이름은 바울. 유대인이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헬레니즘이 몸에 밴 그는 원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던 로마시민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예수를 그리스도라 말하며 전도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문제는 야고보와 바울의 신학적 견해가 달랐다는 점이다.


종교서적으로서는 특이하게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젤롯>에서 글쓴이는 오직 지금의 성서에 적힌 내용만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복원한다. 그에 따르면,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는 당시 로마에 빌붙어 타락한 유대의 정치와 종교권력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예수를 충실히 따른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옷을 팔아 칼을 사라(누가복음)’ 혹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처럼 투쟁적이고 과격한 언사에서 보듯 유대민족주의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은 동정녀 출산, 광야에서의 시험,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등 예수 생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중심에 두고 예수의 가르침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강조한다. 이로 인해 앞서 예수가 언급한 칼은 영적무기나 믿음으로 윤색되고,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한쪽 뺨을 내어주는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예수를 묘사한다.


이 두 관점 간의 갈등은 결국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야고보가 이끄는 유대민족 종교로서의 예수는 사라지고 바울의 세계종교로서의 예수만 남는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유대의 색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그리스-로마의 신들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난 신의 이야기는 로마제국이 받아들이기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현재의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는 이 바울이 만든 세계관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오히려 논란을 일으켰다. 왜냐면 바울이 내세운 완전히 새로운 교리는 예수를 근거로 했지만, 예수도 이해하지 못할 교리였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예수를 받아들인 로마교회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려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이어진 예수의 적통을 대체할만한 대안이 필요했다. 바울은 무엇보다 예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등장시킨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이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증거로 예수가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한을 넘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석’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한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가톨릭이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추대하는 근거가 된다. ('반석'은 주춧돌을 의미한다. 베드로란 이름 자체가 '바위'라는 뜻이므로, 예수가 베드로라는 이름과 바위라는 뜻의 중의적 표현을 통해 제자의 부족한 믿음을 질책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쟁점이다.)


여기에 덧붙여 베드로가 로마로 전도하러 왔다가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는 ‘도미네 쿠오바디스’ 전설을 쫓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250년 만에 그의 무덤을 현재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자리에서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 다녀갔다는 역사적 기록이나 증거는 부족했다. 이후 1,700년이나 지난 2013년에서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 지하에서 발굴했다며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공개했지만 역시 진위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포폴로 성당-8.JPG (사진6-29. 왼쪽 그림이 카라바조 作 <베드로의 십자가형>,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 ©이경석 촬영)
베드로 뼈.jpg (사진6-30. 2013년 11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개한 '베드로 추정 유골' ©BBC뉴스 갈무리)


어쨌든 바울과 베드로의 조합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1차 공의회를 니케아에서 개최하며 ‘삼위일체’까지 확립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예수를 일신교의 틀 내에서 기발하게 절충하며 바울의 교리를 완성한 것이다.


반면에 서기 62년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한 뒤 예루살렘 교회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발생한 유대인 반란으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된 것은 결정적 치명타가 되었다. 야고보를 따르던 자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 기독교 분파들이 여전히 야고보의 예루살렘 교회를 정통이라 주장하면서, 바울의 교리를 기반으로 세가 커진 로마교회(가톨릭)를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는 전승은 여전히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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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이베리아 지도.png (이베리아 반도 지도와 이번에 여행할 곳들, 구글지도를 활용)



[사진출처]

사진6-30. https://www.bbc.com/news/av/world-europe-2508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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