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스페인북부와 포르투갈편-10)
제1차 유대인 반란이 로마에 유린당한 서기 70년,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요르단강 동편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금욕과 고행을 강조하며 유대율법을 극단적으로 추종한 초기 기독교인들이었고, 야고보를 예수의 유일한 후계자로 보았다. 당연히 바울의 교리는 배척되었다. 예수를 메시아라 믿고 그의 재림을 기다렸지만, 야훼만이 유일신이라 보았기 때문에 예수는 야훼의 사도로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었다. 역사는 이들을 에비온파라 부른다.
이후 5세기경에 시온수도회가 나온다. 예루살렘 시온산의 수도원에서 결성됐다는 수도회가 에비온파의 명맥을 잇고 후일 템플기사단의 모체가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대표적이다. 파리국립도서관에 관련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지만, 수도회가 진짜 존재했는지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진 관련 증거가 불충분한 까닭에 아직은 허구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다. 댄 브라운은 상상 속에 존재하던 조직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불러내 소설의 재료로 삼았다. 그럴 듯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뒤섞으니 나타나는 착시일 뿐이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을 전후하여 에비온파와 매우 흡사한 교리를 주장하는 분파가 실제 등장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아리우스가 주장했다 하여 흔히 아리우스파라 부른다.
예수가 인간이자 신이고, 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신 그 자체라는(한마디로, 신은 두 분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신교라고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사실 일반인들이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 로마제국에는 삼위일체가 엉터리라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왕 기독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마당에 신이 아닌 인간(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은 최고의 인간이라도)을 숭배하는 것은 로마 황제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에 야훼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체계화하는 건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보는 유대교를 인정하는 셈이 되니 로마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참에 확실히 정립할 필요성을 느낀 황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를 정통으로 확립하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불법화시키는 정치적 결단을 단행한다.
이후 몇 번의 부침이 있었지만, 아리우스파는 가톨릭에서 점차 배척되었다. 이때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며 서유럽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게르만족은 의도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인다. 정복자가 피정복민의 종교 밑으로 기어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정치적 타협점을 찾는다. 피정복민 대다수가 이미 가톨릭교도라는 현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고 따르는 로마교회의 대주교를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우대하고 보호해주는 대신, 교황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아 합법적인 통치권한을 손에 쥐는 빅딜을 추진했다.
5세기 말, 이 탁월한 정치감각을 발휘한 건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자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인 클로비스 1세였다. 그렇게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족은 다른 게르만 민족들을 압도할 수 있었고, 그들이 세운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의 지배권을 선점하게 된다.
이 시기, 프랑크족에게 쫓겨 이베리아반도로 밀려들어 온 서고트족도 아리우스파였다. 6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들도 우여곡절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하지만 지배계층 가운데 개종에 저항하는 아리우스파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양 종파간 충돌이 발생했고, 충돌의 결과는 바로 무슬림의 이베리아반도 점령이었다.
지브롤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과 마주하는 북아프리카 모로코쪽에 세우타라는 항구도시가 있다.(현재도 스페인령이다) 여기를 다스리던 서고트왕국의 총독이 아리우스파였는데, 수도 톨레도의 가톨릭 개종 왕가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전승에서는 왕이 총독의 딸을 성폭행한 것에 대한 보복이 반란의 원인이라 설명한다)
이때 세우타 총독이 무슬림 군대를 끌어들였다. 사실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가톨릭과는 극단적으로 대립되지만, 이슬람 교리와는 통하는 데가 많다. 예를 들어, 무슬림의 다섯 가지 의무 중에 가장 첫 번째인 신앙고백(샤하다)은 매 기도할 때마다 외는 것인데 다음과 같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다”
알라가 아랍어로 하나님이라는 그냥 보통명사이고, 꾸란은 하나님의 사도로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알라' 대신 '야훼'로 치환하면 정확히 아리우스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해진다.
"야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모세, 무함마드와 함께) 예수는 그분의 사도다"
(그래서 아리우스파가 이슬람교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을 때, 이를 해석해서 이슬람교 창시를 도왔던 무함마드의 부인과 처남이 아리우스파 신도였다고도 전한다)
그러니 무슬림이 아리우스파를 도와주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무슬림은 그렇게 쉽게 아리우스파의 도움을 받아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다.
아리우스파가 예수를 인간으로 본 건 결코 예수를 격하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깨달음을 통해 신과 합일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쳤다. 깨달음은 그리스어로 ‘그노시스’라 하는데, 여기서 그노시스(영지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마치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처럼 말이다.
1945년 이집트의 작은 시골, 나그함마디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문서들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발견한다. 삼위일체파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승리한 후, 지금의 성서에 포함되지 못하고 모두 불살라진 줄 알았던 다른 복음서들이었다.
카이로의 콥트박물관으로 옮겨진 문서들은 그노시스 운동에 힘을 실어줄 만한 내용이 많다. 그중에는 특히 ‘야고보의 비밀가르침’이나 ‘야고보의 계시록’ 같은 코덱스(사본)가 눈에 띈다. 예수가 부활한 이후 자신의 후계자인 야고보에게 전해 준 교의들이다. 이로 인해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그노시스 운동의 뿌리로서 그를 중심으로 또다른 영성의 흐름이 형성됐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가톨릭과 대립했던 사람들은 이후 어디로 갔을까? 이들은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탄압받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건 바로, 가톨릭교도인 척 위장하며 여전히 가톨릭교도들과 섞여 가톨릭 성당에서 그들만의 찬양과 미사를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쓰는 언어와 숭배 대상이 가톨릭 안에서도 결코 의심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모든 건 중의적으로 표현되었다. 노트르담(Notre Damn, 우리의 귀부인, 영어로 Our Lady)의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일 수도 있고 막달라 '마리아'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야고보는 '대(大) 야고보'일 수도 있고,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인기가 혹시 예수의 형제 야고보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이 든 건 그래서였다. 그 흔적을 성당에서 실제 찾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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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6-32. By Jjensen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610911
사진6-33. By Arnaud 25 - Own work,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736675
사진6-34. By WolfgangRieger - The Gospel of Judas. Critical Edition. Washington 2007,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993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