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 8월, 버터를 파는 시장 한켠에 인부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벤치를 설치하는 공사였다. 그때 한 인부의 곡괭이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혔다. 커다란 돌이었다. 그런데 자연석이 아니었다. 분명 사람이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 커다란 돌을 들어내자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밑으로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뚫린 갱도가 나타난 거다.
줄을 늘어뜨려 내려가자 처음의 좁은 입구가 점차 넓어지더니 높이 8m, 지름 5m의 공간이 나타났다. 영락없이 키세스 초콜릿 같은 형태다. 좁은 바닥 중앙에는 지면보다 약간 높게 팔각형으로 된 조그만 단도 설치되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의 미스터리는 중세 기독교와 관련된 부조로 꽉 채워진 벽면에서 증폭되었다.
부조는 성 캐서린 등 네 명의 기독교 순교 성인들과 함께 십자가 처형 장면 등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묘사한다. 그 중에는 오른손엔 두개골, 왼손엔 양초를 든 사람처럼 오컬트 의식이 연상되는 이교도적 조각도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인물들의 복장이나 검과 같은 상징물의 디자인을 봤을 때 13세기 전후에 새겨졌다고 추정했다. 이밖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알 수 없는 상징들은 템플기사단과 관련 있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곳에서 템플기사단이 예배나 입문의식을 치렀고, 박해 이후에는 비밀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을 거라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발단은 스코틀랜드 국왕이면서 엘리자베스 1세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까지 된 제임스 1세로부터 시작된다. 템플기사 윌리엄 마샬의 피를 이어받은 왕은 프리메이슨을 적극 후원했거나 혹은 본인이 프리메이슨일 거라 믿어지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에딘버러에서 런던으로 내려오던 도중 특별한 이유없이 로이스턴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웨스트민스터 궁까지 불과 60km를 앞에 두고 말이다.
왕이 된 이후에는 아예 이 작은 마을에 별채를 지어놓고(아직도 동굴 부근에 ‘Old Palace’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로이스턴 서쪽 광활한 평원 ‘터필드 히스(Therfield Heath)’에서 사냥을 즐겼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게 결혼이라 말하고 다닐 정도로 부부 사이가 안 좋았던 왕이었기에 별거에 필요한 도피처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템플기사단 본부와 영지가 있던 주변의 지역적 특성과 연결되면서 그가 이곳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했을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특히나 로이스턴은 로마 시대부터 런던과 요크를 남북으로 잇던 얼마인 도로(Ermine St)와 켈트족들이 서쪽의 솔즈베리 평원과 잉글랜드 동쪽을 연결했던 이크닐드 도로(Icknield Way)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현대 영국에서 이 도로들은 각각 A505 국도와 A10 국도로 활용되는데 지금도 로이스턴에서 교차한다. 교차지점에는 중세시대 전통에 따라 돌십자가(Roisia’s Cross)가 세워졌다. (지금도 주춧돌은 남아있다) 알고 보면 로이스턴은 고대부터 잉글랜드의 교통 요지 중의 요지였던 셈이다. 모임 약속장소로 제격인 교차로의 지하에 동굴이 있고, 제임스 1세가 자주 들락날락했으니 그런 소문이 나오지 않은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암튼 동굴의 용도에 대해 여러 설들이 있지만 확실한 건 없다. 어떠한 기록도 없으니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이런 의문투성이 유적이 재미있기는 하다. 참고로 지금은 지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지는 않고, 약 22m의 새로 뚫린 터널을 통해 동굴에 들어갈 수 있다.
북쪽으로 여행을 계속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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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