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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Nov 12. 2020

공짜로 해주면 안 될까? 간단한 작업인데!

열정 페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한국에서도 몇 년 전 이슈가 되었지만, 미국에서 열정 페이식 노동착취는 시각 디자인 업계의 단골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십 년 전에 학교를 다니면서 보았던 무임금 노동착취가 지금도 미국에서는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래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발단: 박군은 디자인 스쿨 4학년 학생이다. 학생이지만 괜찮은 디자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 

전개: 어느 날, 직원이 다섯 명 정도 되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이메일이 온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 중인데 육 개월 뒤 모바일 앱 론칭 예정이라고 한다. 프리랜서 시각 디자이너를 모집하고 있다고 하며 관심이 있는지 물어본다. 

위기: 아직 취업이 확정되지 않은 박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면접 일정을 잡는다.

절정: 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고, 페이에 대해 물어본다.

결말: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아직 스타트업 초창기라 돈이 없기 때문에 페이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지금 개발하는 새로운 앱이 론칭하게 되면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고, 따라서 박군은 주목받는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미국식 열정 페이의 예이다. 지난 십 년 동안 위의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급한 마음에 위와 같은 부당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하는 학생 혹은 새내기 디자이너들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그들의 조급한 마음을 알고, 이를 악용하려는 악덕 고용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뉴욕에서는 매년 7,000명의 새로운 디자인 스쿨 졸업생이 시장에 나온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 조급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새내기 디자이너들의 심정이 이해된다. 나도 새내기 디자이너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악덕 고용주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안다.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이슈인 것 같아 이 기회에 글로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 글이 문제 해결의 작은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디자이너로서 보수를 받을 수 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할 필요가 없는지 지금부터 악덕 고용주의 말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따져보도록 하겠다.



1. “스타트업 초창기라 돈이 없다.”

사장이나 의사 결정권자가 이런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재정 상태가 엉망이거나 적절한 투자를 받지 못할 정도로 미래가 어두운 회사이다. 재정 상태가 안 좋은 회사 혹은 적절한 투자를 못 받은 회사라면 미래가 유망한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유망한 회사들은 벤처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서로 투자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대박 앱을 개발해서 테슬라 Tesla나 우버 Uber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2) 혹은 적절한 투자를 받았으나 디자인 분야에 예산을 적게 편성한 회사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디자인 분야에 투자할 생각이 없는 회사라는 의미이다. 그런 회사에 가서 자신의 디자인이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되려 그림자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3) 혹은 돈이 있는데 면접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번이 회사가 당신에게 하는 마지막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회사는 당신을 쓰다 버릴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 “디자이너로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짜로 일해 달라는 회사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자발적으로 개인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큰 회사에 고용된 것처럼 열심히 개인 작업을 하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더 나은 포트폴리오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테슬라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다면 테슬라에서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 주제로 여러 가지 실험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포트폴리오를 구성해보는 것도 좋다. 종종 감동한 회사 측에서 특별 채용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애플 본사에 입사한 한국 출신의 시각 디자이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3. 간단한 작업이니 무료로 해달라.

이건 한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당신의 고용주는 디자인 작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디자인일지라도 오랜 시간 깊이 있는 생각과 다양한 시도를 통해 만들어진다. 디자인 작업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작업인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결과물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디자인에 관한 기본 상식이 없는 고용주 밑에서 무료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굳이 직접 해보지 않고도 이해하는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다.


4. 여기서 일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뛰어나게 좋은 회사에서는 돈은 못 받아도 좋은 디자인은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크고 유명한 회사에서는 조직과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고 인지도가 낮은 작은 회사인 데다가 공짜로 디자이너를 착취하려는 회사라면 배우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가끔 존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일해보고 싶은, 꿈에 그리던 사람과의 작업이라면 무료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그 사람이 진정 당신이 꿈꾸는 모습 그대로라면, 당신을 무료로 고용하는 것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유료로 고용하는 것도 거부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럴 때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다.


대가를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받는다.
You get what you pay for.


약자를 착취하려는 악당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오늘도 미래가 촉망되는 어린 디자이너가 어느 으슥한 뒷골목에서 열정 페이를 강요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진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대가를 주고받으며 합리적으로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우리는 항상 지불한 대가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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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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