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 그 음식2 – 2002년에 만난 인생 맥주
첫 해외여행이었다. 주변에 물어봤다. 준비할 게 뭐 있느냐고. 다들 눈만 껌뻑거렸다. 해외여행은커녕 제주여행도 안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글쎄” 하며 희미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하긴 서울 봉천동 반지하 전세 1500만원짜리 집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에 전세 1500만원짜리 방 두 칸짜리 집이 있다고?”라면서 놀라는 이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겐 현실이었다.
봉천동집 주거주자는 네 명. 수전증이 있지만 프로게이머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오, 우리 주변에선 옷 잘입는다고 평가받던 영화촬영감독 지망생 윤, 몇년 째 노무사 시험 준비를 하던 채. 그리고 나였다. 그 외에도 채와 함께 노무사 준비를 하는 김, 윤보다 조금 더 일찍 촬영일을 시작한 오 등이 자주 들락거렸다.
우리 중 첫 해외여행자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다들 달나라 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현실감 없게 받아들였다. 그 중 세상사에 밝은 채가 “환전해야 하는 것 아냐”라는 말을 했다.
환전은 어디서 하는데? 무슨 돈으로 바꿔야 하는데? 하는 물음엔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환전을 어디서 해야 하는지. 공항에서 해야 하는지, 은행에서 하는지, 한국에서 하는지, 현지에 가서 하는 것인지. 달러로 해야 하는지, 현지 화폐로 해야 하는지, 얼마를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게 많았고 그 모든 것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금붕어 같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일 때문에 가는 거라 숙식부터 비행기까지 모두 제공되니까. 나는 돈 안쓰면 되고.”
이렇게 말하고 출발할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생각도 취하지 않았다. 출발 중간에 주최측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들어왔다.
‘필리핀 남부 반군들이 활동을 하고 있어서 못갈 수도 있다. 상황을 지켜봐야겠다.’
필리핀에 반군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고, 깜짝 놀랄 만한 뉴스였다. 그렇게 멀지 않은 아시아 국가인데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가 있었지? 반군에 대한 걱정보다는 혹시 못떠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주변 사람들은 “가면 가는 거고, 못가면 못가는 거지. 하하”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봉천동집에선 대략 일주일에 네다섯 번 정도 술파티가 열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여자친구의 과제물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처음엔 살짝 조언만 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여자친구가 생각보다 너무 헤맸고, 내가 생각 이상으로 유능했다는 점이었다.
점점 내가 신경써야 할 영역이 커졌다. 여행은 6박7일 일정인데 과제 제출일이 출발 이튿날이었다. 어떻게든 출발 전에 과제물을 마치고 떠나야 했다. 여자친구가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웃음이 사라졌고, 침울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 소화불량 증세까지 보였다.
“이건 어떻게 하지, 이 다음엔 어떻게 하지”라면서 수시로 물었다. 나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첫해외여행이니 반군이니 필리핀이니 이런 것들은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럴 거면 반군이 더 기승을 부려 깨끗하게 취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출발 며칠 전 주최측에서 연락이 왔다. 현지 사정이 좋아져 출발할 수 있게 됐다고. 과제물 완성을 서둘러야 했다. 둘 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과제물이었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과제물이 최종 완성된 것은 출발 당일 새벽 5시 10분.
한 번 읽어볼 여유도, 오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공항 도착 시간이 정각 7시였다. 집에 뒹구는 제일 큰 가방을 찾아 양말이며 위아래 옷이며 속옷, 세면도구 등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짐 싸는 데 걸린 시간이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 중 그나마 세상사에 밝은 채가 택시값이라며 몇 만원을 내밀었다. 이어 “혹시나 싶어 뒤졌더니 이게 있네”라면서 못보던 지폐 하나를 내밀었다. 100달러 지폐였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나를 채가 다시 한 번 붙들었다.
“김포공항 가면 안된다. 인천공항으로 가야 한다. 알지?”
채는 겉으론 털털하고 남자다웠지만 잔 생각도 많았고, 섬세한 면이 많았다. 몽롱한 가운데 그 때도 김포공항이었나, 인천공항이었나 헷갈리던 참이었다. 인천공항이 한 해전 문을 열었지만 나에겐 너무 생소한 이름이었다. 인천공항이라고 하면 되나? 인천국제공항이라고 안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로로 나섰다.
그 날 따라 택시가 왜 이리 없는지. 다행히 7시에 공항에 도착했고, 8시 30분 탑승을 끝냈다. 마닐라 아키라 국제공항에 도착한 건 11시 48분. 비행기에서 자는둥마는둥 한 상태라 다소 몽롱했지만 더운 나라의 훈기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어느 사무실로 이동했다. 이번에 필리핀에 온 목적은 필리핀 시민운동과 주민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었다. 첫날은 도시생태 문제에 있어서 정부와 민간기구의 파트너십, 필리핀 쓰레기 문제 해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발제자, 토론자, 질문자가 하는 말을 빠짐없이 타이핑하는 것. 비록 통역이 있어서 틈틈이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쉬는 시간은 문장을 다듬어야 했다. 누군가는 영어로 말을 했지만 누군가는 따갈로그어(필리핀 현지어)로 말을 했다.
통역을 하는 와중에 문장이 튀거나 툭툭 끊어지는 일이 종종 생겼다. 통역이 현지인 말에 귀를 기울일 때면 앞뒤 맥락을 파악해 문장을 서둘러 이어야 했다.
쏟아지는 말의 분량은 엄청났다. 이들은 모두 전문가들이었고, 사례가 풍부했다. 게다가 의욕이 넘쳤다. 한국에서 간 이들도 마찬가지. 거의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수면부족에다 시차적응문제, 더위가 가져오는 피곤 등이 있었지만 첫여행이 가져다주는 설렘, 이 중요한 자리를 망치면 안된다는 긴장감이 겹쳐 놀랄 만한 몰입감을 유지했다.
아마 학창시절 지금과 같은 태도로 공부했다면 훨씬 시험성적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것 같다.
첫날이었지만 이야기는 5시간 동안 이어졌다. 컴퓨터 문서 화면이 몇 장째 넘어갔는지 모르겠다. 30도가 넘는 더위였지만 에어컨 같은 건 없었다. 선풍기 몇 대가 앞 뒤에서 돌아갈 뿐이었다. 여기는 필리핀이었고 더위에 대해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땀이 흘러내려 바지를 적셨고 불편해질 때면 잠시 엉덩이를 들어올려 ‘탁탁’ 털어야 했다. 손수건이라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흘러내린 땀 때문에 흥건한 물접시 위에 앉아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밖이 살짝 어두워지고 실내에 불이 켜지고 그러고도 설명이 이어진 얼마 뒤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끝났다는 신호. 정신없이 타이핑하느라 막바지였다는 것도 몰랐다. ‘휴’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녁을 먹고 현지 가이드가 마닐라에서 재미있는 곳을 소개하겠다며 안내했다. 입구에서부터 흥청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술을 파는 곳이었다. 필리핀 느낌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영어가 적혀 있었다. 필리핀스럽다 싶었지만 그렇게 자랑할 만한 곳인가 싶었다.
술이 나왔다. 진한 갈색 유리병에 ‘San Miguel’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본 외국 맥주. 병이 작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나면 병을 들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병을 따자마자 술을 들이켰다. 한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가 정해졌다. 그대로 몇 병을 들이켰다.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
적당히 기분이 좋아졌을 때 실내 조명이 바뀌며 흥겨운 음악이 큰 소리를 내며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실내에 있던 종업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나는 춤이었다. 필리핀의 흥이 그대로 전해졌다.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던 걸까. 종업원 중 한 명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에 이끌려 홀로 나갔다. 주위를 보니 일행들도 모두 일어서 있었다. 잠은 부족했고, 여긴 외국이었고, 위장엔 이미 산미구엘 10병 정도는 들어가 있었다.
비교하면 피노키오가 춤을 더 잘 추는 수준이었건만 외국과 술 그리고 수면부족이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날 일행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다. 깨고 난 뒤 생각하니 민망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감히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어쨌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강행군은 이어졌고 저녁이면 산 미구엘을 마셨다. 6박7일 동안 집단 빈민지역을 둘러보고, 현지 쓰레기처리 시스템, 여성문제, 미군기지, 이주마을 등을 살펴봤다. 모두 남다른 경험이었고, 정신이 맑아지는 장면들이었다.
세월이 꽤 흘렀다. 필리핀을 다녀온 뒤 다시 외국으로 나가기까지는 꽤 시간이 지나야 했고, 그 동안 산 미구엘은 여전히 나에겐 최고의 맥주였다. 물론 필리핀 현지에선 아주 싼 맥주였지만 한국에선 비싸고 구하기 힘든 맥주였고, 그 때까지 한국에서 외국 맥주를 마시는 건 아주 사치스런 일이었다.
세월이 더 흘러 외국맥주가 아주 흔해졌고, 비싼 취미도 아니게 돼버렸다. 세계 각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맥주맛을 보게 됐고 취향도 다양해졌다. 산 미구엘 또한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맥주 중 하나가 돼 버렸다.
2002년에서 세월도 꽤 흘렀다. 그 시절 느꼈던 그 흥도 그 긴장도 그 수면부족도 이젠 아기 머리에 난 잔털처럼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가끔 대형마트나 편의점 맥주판매대를 지나칠 때면 산 미구엘 앞에서 잠시 멈췄다 가곤 한다.
산 미구엘을 떠올리면 여전히 그 때의 흥이 떠오른다.
#맛으로여행한다 #맛으로기억한다 #첫해외여행 #첫외국맥주 #20대자취
* 2002년 9월 19일부터 25일까지 필리핀에 다녀왔다
* 봉천동은 2008년 9월부터 이름이 바뀌었다. 봉천본동과 봉천9동은 은천동, 봉천2동과 봉천5동은 성현동, 봉천4동과 봉천8동은 청룡동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