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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치과 의사 선생님

제 신체 중에서 가장 허약한 부분은 아마 치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가 못나게 자랐고 14살이 되던 해에 교정을 했습니다.

당시에 단칸방에 살며 돈도 없었을 땐데 몇백만 원이나 들여서 이를 교정해주신 어머니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고통스러웠던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치아가 가지런해지고 탈착이 가능한 보조 교정기를 꼈는데, 어린 저는 친구들에게 틀니 끼고 다닌단 소리를 듣기 싫어서 보조 교정기를 잘 안 하고 다녔습니다.

잘 교정되었던 치아들이 곧 다시 조금씩 돌아가버렸습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일을 꼽겠습니다. 이보다 더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아무튼 1994년도에 처음 갔던 그 허름한 치과에는 의사 선생님 한 분과 간호사 누나들이 5명 정도 있었습니다. 항상 부쩍 대고 사람이 많아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죠.

저는 지금도 1년에 두 번씩 그 치과를 찾습니다. 제 치아가 약하니 정기 검진이라도 잘 받고 스케일링이라도 자주 하려는 생각입니다.


이곳은 변한 게 없습니다. 똑같은 건물에, 입구에 발을 디디면 나기 시작하는 냄새까지도.

25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선생님이 계시고 그때의 간호사 누나들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당시 20대 청춘이던 간호사 누나들은 이제는 50살쯤 되었으려나요. 누나라고 호칭하기도 민망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직원들이 떠나지 않고 일하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저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댓말을 해줍니다. 아마도 그러기엔 제가 너무 훌쩍 자라 버린 걸까요?

"어머니는 건강하시죠? 어머니 잘해드리세요."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시면서 번 돈으로 저를 교정시켰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는지 항상 가기만 하면 어머니 얘기를 꺼내십니다.




치과에 다녀오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고 모든 것들이 변했는데 선생님과 치과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 이제 별로 많지 않아서 더욱 특별합니다.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옛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은 도대체 몇 년이나 그 건물을 지키고 있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건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서비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아두면 꽤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1987년...!

무려 35년.


35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작고 낡은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하셨다니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고 의대를 나왔고, 돈도 넘치도록 충분히 많이 버셨을 텐데요.

어쩌면 자기 삶에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인 건 아닐까. 돈이나 명예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 묵묵히 한 걸음씩.


저는 이런 태도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나는 과연 인생을 걸고 어떤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죽을 때까지 매일 할 일을 갖게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면 선생님과 지금까지 개인적인 대화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다음 치과에 가면 같이 밥이나 한번 먹어줄 수 있냐 조심스럽게 부탁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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