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로 가족과 국내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
해외여행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만 국내 여행도 참 매력적입니다.
최근에 제가 선호하는 여행은 유명한 지역이 아닌 인구 20만 이하의 소도시를 가보는 것입니다.
이런 한적한 소도시에 평일에 방문해서 특별한 일정 없이 길거리를 걸으며 동네와 시장을 구경하고 식당에 들어가 로컬 사람들과 섞여 밥을 먹습니다. 저는 이런 여행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여러 명소들을 못 봐서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여행하는 것이 그 도시를 더 잘 느끼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여행 중 하나는 어머니와 둘이서만 다녀왔던 논산 여행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논산 연무대에서 태어나서 쭉 살다가 20살에 홀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제가 옛 생각에 한 번씩 가리봉동을 다시 찾아가듯이 어머니도 논산에 가보고 싶지는 않을까.
어머니가 살던 곳과 기억나는 장소들에 데려가드리자.
서울에서 논산까지 운전을 하면서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낳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궁금한 점들을 계속 물어가며 논산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 가까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참 좋았습니다. 40살이 넘어서야 부모님의 삶에 대해 알게 되다니.
이 여행이 없었더라면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을까.
연무대에 도착해 고향을 둘러보며 어머니는 좋아도 하고 슬퍼도 하셨습니다.
어릴 때의 아픈 기억들이 마음을 찌르나 봅니다.
차로 어머니의 고향길을 천천히 지나다가 어머니가 어떤 집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저 집에 친한 언니가 살아서 자주 놀러 갔었는데..."
저는 잠시 차를 멈춰드립니다.
어머니가 차에서 내려 집 앞을 둘러보는데 글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친한 언니였습니다.
50년 전에 살던 집에 계속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차에서 지켜보던 저에게도 정말 신기한 순간이었습니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친한 언니(꽃무늬 옷)는 어머니와 친했던 동네 오빠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합니다.
동네 오빠는 결혼 직후 저 집 뒷마당에서 전기 작업을 하다가 감전되어 즉사했다고 하네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50년 넘게 홀로 동네를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두 분의 만남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네 농협에 가서 제일 비싼 소고기 세트를 사서 선물해드리고 헤어졌습니다.
이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땐 학교, 커서는 회사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만 관심을 뒀지 어머니의 삶에는 너무 관심 없이 산 것 아닌가? 반대로 어머니는 내 삶에만 관심을 두면서 살아왔을 텐데.
심지어 옛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이제 만나지도 않잖아?
이렇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앞으로는 새로운 지역을 다니며 어머니와 새로운 대화를 더 많이 나눠보고 싶습니다. 옛날이야기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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