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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갱신청구권 유감

저는 건물주이면서 세입자이기도 합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전세로 살고 있습니다.


2년 동안 매우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을 구했을까?

아내가 집을 보는 눈썰미가 좋은 것 같습니다.


결혼 후 지금까지 3개의 집에서 살아봤는데 제가 선택한 첫 번째 신혼집은 망했고 ㅋㅋ

(강남역에 있는 오피스텔을 선택했는데 강남역 한복판이 주거용으로는 그리 좋지가 않더군요)

아내가 선택한 2번째 3번째 집은 아주 좋았습니다.

앞으로 집을 구할 땐 꼭 아내의 말을 들을 생각입니다. ㅋㅋ


지난 8월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 만기일이었습니다.

만기 두 달 전인 6월까지 서로 연장에 대한 대화가 없으면 묵시적으로 연장이 됩니다.

6월이 지나고 '아 묵시적 연장이 됐구나' 했지만 혹시 7월에 집주인에게 연락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두 달 전이 아니라 한 달 전까지만 협의하면 됐었거든요. 집주인이 바뀐 법률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깐.


7월에도 집주인은 연락이 없습니다.

8월 만기가 지나도 집주인은 연락이 없습니다.


'우와 진짜 묵시적 연장이 됐다. 요즘 집값이 많이 올랐는데 하나도 안 올리시네.'

아래층에 사는 집주인 어르신 부부는 저희를 좋아하나 봅니다.

마주치면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저희 또한 부모님에게 하듯이 잘 대해드리거든요.


앗, 그런데 계약 만기일이 보름쯤 지난 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아니? 이건 무슨 뜻이지.

우리가 좋아서 그냥 살게 해 준 게 아니라 그냥 날짜를 까먹고 있었던 거로군.

이런.....ㅋㅋㅋ


묵시적 연장은 세입자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우리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쓴 것도 아니고 전세보증금을 올려줄 필요도 없이 앞으로 2년간 제가 살고 싶은 만큼만 살다가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제 권리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집주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기일을 까먹은 집주인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기로 아내와 대화 나눈 뒤 전화를 드립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계약서만 다시 쓰면 될까요? 혹시 돈을 더 올려 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당연히 올려받아야제."

"하하하, 그렇군요. 얼마나 올려드리면 될까요?"


저는 오직 1회 사용 가능한 매직카드,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면 되니 편하게 물어봅니다.


"음... 뭐 요새는 5프로밖에 못 올린대매? 그렇게 하지 뭐."


다행히 5퍼센트만 올려달라고 하십니다.


연장 계약서는 제가 써서 보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특약사항을 넣어달라고 요구를 하십니다.



1번과 2번은 제가 이번 계약에서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했다는 것을 명시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오케이, 좋습니다. 이건 각오했으니까요.

그런데 3번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이건 임대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세입자를 내보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년간 임차인의 주거를 보장하는 것이 임대차 보호법의 핵심 중 하나인데 이걸 임대인이 마음대로 해지가 가능하다고? 그럼 나는 뭐하러 이런 계약서를 쓰는 거지?

계약서 안 써도 이미 2년간 보장되는 상태인데? 돈도 올려주고 매직카드도 사용해버리고 2년 거주도 보장을 못 받게 한다고?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돌아오니 맘이 좀 상합니다.


집주인 입장에서 좀 더 생각해봅니다.

계약 만기일을 놓친 것을 깨닫고 집주인은 아차 싶었을 것 같습니다.

날짜가 지났음에도 계약서를 다시 쓰자는 집주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겁니다. 쪽팔리기도 하고.

그만큼 계약갱신청구권이 집주인에게는 부담이 됐던 것은 아닐까.

1년에 5퍼센트도 아니고 2년에 5퍼센트밖에 못 올린다니.

이 조건이 얼마나 싫으면 임대인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특약사항을 넣고 싶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메시지를 보내서 3번의 내용은 빼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묵시적 갱신이 된 상태인 현재 우리의 권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도 살짝 흘려 말하면서 ㅋㅋ


다행히 일은 잘 풀렸습니다.

저는 전세보증금 5퍼센트를 올려주고 2년간 이 집에서 더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며 친구들과 의논하다가 한 친구의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셋집이 마음에 들어 계속 살고 싶은데 집주인이 자기가 들어와야 한다고 나가 달라했답니다.

요새 집값이 너무 올라서 집주인 본인도 정말 갈 곳이 없어서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요.

이 집에 좀 더 살고 싶었던 친구는 5.5억에서 7억으로 30퍼센트에 가깝게 보증금을 올려주고 나서야 계속 살게 되었습니다


참 난리다 난리.


계약갱신청구권 때문에 2년 후 전세시장에 큰 충격이 온다고들 합니다.

어쩌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집주인들은 어떻게든 계약갱신청구권을 피해 가려 온갖 수를 쓰고 있고 이미 시세는 이렇듯 하루하루 맞춰지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집주인이 계약 만기를 잊지 않았다면 크게 전세금을 올려주었거나 이사를 가야 했었을 겁니다.


집주인이 (뻥이든 진심이든) 직접 들어와서 살겠다 했을 때 이를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세입자가 퇴거한 뒤 2년 동안 해당 집의 임대차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긴 하지만, 열람해서 집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때 가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라도 하면서 개싸움을 하라고?




프로그래밍은 법률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일관성 있게 코드를 짜야하고 중복되는 코드를 피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코드에 계속 땜질을 하기도 합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코딩을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계약갱신청구권은 프로그래머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한 땜빵 코드입니다.

없는 게 훨씬 깔끔하고 아름다운데 괜한 코드를 써놔서 이로 인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는 느낌.

저는 이 코드가 참 맘에 안 듭니다. 회사였다면 어떻게든 이 코드를 지우고 말았을 텐데 법률은 제가 지울 수가 없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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