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 pack] ISFP
[Four pack] ISFP
“'야'라고 하지 마. 내가 형이잖아.”
“너도 했잖아. 너가 저번에 승빈이 형한테 ‘야’라고 부르는 거 봤거든.”
“그건 그런데… 이 바보야. 원래 형한테는 ‘야’라고 하면 안되는 거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 너가 바보네.”
“나 바보 아니거든! 이 쪼그만 게!”
호동이는 동생 호석이의 머리통에 주먹을 쥐어 박았다.
“으앙! 엄마 형아가 때렸어.”
호동이는 동생과의 말싸움에서도 이기지를 못하고, 분한 마음에 항상 먼저 주먹을 날린다. 하고 싶은 말은 마음 속에 많은데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답답한 마음 뿐이었다. 저렇게 얄미운 말들은 어떻게 꺼내는 걸까? 손가락을 낚싯대처럼 구부려서 목구멍 안을 후비고 싶었다. 저 안에 들은 말들을 꺼낼 수만 있다면.
호동엄마는 낮에 있었던 일들로 속이 시끄러웠다.
하원 셔틀버스에서 내린 호동이와 유나가 서로 얼굴이 씨뻘개져서 씩씩거렸다. 셔틀선생님이 자세히 보지는 못하셨지만 호동이가 덩치가 크니까 움직이다가 유나를 친 것 같은데, 유나도 참지 않고 서로 때리고 싸우게 된 것 같다고 한다. 유나엄마의 불쾌한 목소리.
“호동이가 이번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자꾸 애들을 먼저 그렇게 툭툭 건드리고 다닌다면서요. 호동엄마가 너어무 착해서 호동이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유나가 그러던데요?”
무조건 미안하다, 너도 사과해라. 죽어도 먼저 때린 적이 없다며 소리지르는 호동이 머리를 억지로 꾹 눌러가며 유나에게 사과시키고 집에 올라왔다. 그런데 전화기 속 건우엄마 왈, 오늘은 진짜로 호동이가 먼저 때리지 않은 것을 건우가 봤단다.
“이걸 말을 해, 말어? 안하자니 호동이를 계속 가해자로 볼 것 같고, 말하자니 증거 있냐고 본전도 못 찾을 것 같고. 아유, 너네 둘 다 조용히 안 해?”
호동이가 평소에 장난이 심한 건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진짜 억울한데. 그렇다고 애들엄마끼리 얼굴 붉히고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걱정스러웠다. 상대가 기분나쁘지 않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한 방에 먹일 수 있는 말 솜씨가 없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날렵한 혓바닥만 있었다면.
“엄마,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목도 따끔거리고 열도 있는 것 같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호동이가 얼굴이 벌개져서는 다가왔다. 아닌게 아니라 호동엄마도 구내염이 심하게 난 것 같이 입 안이 쓰라렸다.
“너는 항상 엄마가 아플 때 꼭 같이 아프다고 하더라. 그런 거는 좀 안 따라해도 돼!”
(아니야아! 진짜 아프다고!)
“엄마를 귀찮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 아픈거야. 그렇게 말하면 엄마도 아픈데 내가 꾀병부리는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잖아.”
호동이는 말을 하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토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 저절로 목구멍 밖으로 우루룩 쏟아져 나왔다.
“어? 그래, 호동아. 아픈 거는 미안한 일이 아니지. 엄마가 피곤해서 말이 따갑게 나왔네. 얼른 병원가자.”
그런데 말을 토하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졌고, 엄마가 호동이의 얘기에 더욱 신경을 써주는 기분이 들었다.
감기가 유행이라 그런지 병원에는 재하랑 태희도 와 있었다.
“재하야, 호동이 왔다. 우리 저 쪽으로 가서 놀자. 쟤 또 분명히 장난칠 거 뻔해.”
태희는 병원에 들어서는 호동이를 보자마자 재하 팔짱을 끼고 다른 의자로 가서 앉으려 했다.
“태희야, 내가 오늘 병원 들어와서 너네한테 아직 한 마디라도 했냐? 그런데 왜 사람을 그렇게 따돌리면서 얘기해? 나는 진료받으러 온 거지, 너네랑 장난치러 온 거 아냐.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멀리 바꾸면,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어?”
재하와 태희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같으면 ‘너네 왜 나 안 끼워주냐’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재하와 태희를 쫓아다녔을 호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호동아… 너 많이 아픈가 보구나. 알겠어. 우리 그냥… 여기 앉을게.”
그런데 진료 결과, 이상하게도 호동이와 호동엄마는 감기가 아니었다. 목도 입도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고 건강했다.
둘 다 멀쩡하게 병원을 나와, 할머니댁으로 갔다. 저녁에 있을 제사 준비를 해야 한다. 호동엄마는 시댁 문을 밟으며 마음 속으로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헬렌켈러다.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말을 못한다.’
오늘은 그런데 그 말이 까먹은 듯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정신없이 과일을 깎고 전을 부치는데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 에미야. 전 중에 동그랗게 잘 구워진거는 늬 남편주게 이쪽으로 빼놓고, 좀 부숴진거는 너랑 나랑 이따가 해치우자.”
“어머, 어머님. 저도 동그랗게 잘 부쳐진 전 좋아해요. 그리고 부숴진 전도 맛은 똑같은 건데 호동아빠도 먹을 수 있는 거잖아요.”
“아아니, 보기 좋은 거 애비주는 게 너는 그렇게 아니꼽니? 쟤가 왜 안하던 말대답을 해? 저 쪽에 가서 굵은 소금이나 좀 꺼내 가지고 와라. 아니 그 쪽 말고 그 옆에, 아니 고 아래, 너는 지금 우리 집에 시집온 지 몇 년째인데 굵은 소금을 아직도 못 찾아!”
“어머님? 어머님이 어디에 두셨는지 ‘저 쪽’이 아니라 ‘찬장 두 번째 아랫 서랍’이라고 한 번에 얘기해 주시면 금방 찾을 수 있었겠죠. 저희 집이 아닌 곳에서, 제 살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어머님 마음의 기준에 들게 행동을 하는 것이 저도 참 쉽지는 않네요.”
호동엄마는 자신의 혓바닥을 손으로 붙잡고 싶었다. 헬렌켈러의 다짐을 되새기지 않고 들어와서인가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혓바닥은 평소 마음에 있던 말까지 그대로 다 쑤셔 내고서야 멈췄다.
발칵 시댁을 뒤집어 놓고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온 호동엄마는 호동이와 아파트 현관 계단에 털퍼덕 앉았다.
“호동아, 오늘 엄마가 용감하다… 그치?”
“응. 엄마, 그런데 나도 오늘 씩씩하다? 원래였으면 말이 잘 안나와서 답답하니까 화도 나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주먹도 휘두르고 그랬는데 오늘은 화보다 먼저 말이 주루룩 나와서 화가 안 나. 그동안 내가 왜 화를 냈었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로 하면 되는데.”
“엄마도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 나오더라. 그런데 엄마는 좀 달랐어. 어른들의 세상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안되는 법이거든.”
“엄마, 왜 아이들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못하고, 어른들은 할 말은 생각이 나는데 말을 하면 안 되는거야?”
“호동아, 아이들의 마음은 넓은 바다야. 그래서 바닷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찾아서 꺼내려니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그런데 꺼내서 보면 조약돌처럼 동글동글해. 누가 받아도 아프지 않지.”
“그럼 엄마 마음은 어디야?”
“어른들의 마음은 이미 오랜 시간 바다에서 꺼내 쓴 말들이 잔뜩 쌓여 있는 건어물 창고야. 그래서 그 마음이 말이 되면 딱딱하고 거칠단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다듬지 않고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던지면 받는 사람이 아플 수 있어.”
호동엄마와 호동이는 손을 잡고 일어났다. 종일 휘둘러진 혓바닥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시원했다.
“호동아, 그런데 오늘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겨져 있던 말들을 혓바닥 얘가 막 휘젓고 꺼내놓는 바람에 속은 아주 시원하다. 엄마가 그동안 모른 척했더니 마음이 튀어나오고 싶었나봐. 어쩐지 아침부터 혓바늘이 돋은 듯이 입 안이 아프더라구.”
“나도 아침엔 목구멍이 이상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졌어. 엄마, 그러면 엄마도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으면 모른 척하지 말고 조약돌처럼 다듬어서 말해봐. 마음에 담아두면 토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 아프게 막 튀어나오니까.”
“그럴까? 그럼 엄마가 오늘처럼 말이 잘 나오는 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호동엄마는 호동이와 서로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호동엄마는 조용히 유나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