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조르고 졸라서 시작한 등산에 이제 슬슬 재미가 붙는다. 그 힘든 곳을 왜 올라가냐. 내려와야 하는 곳을 왜 올라간다냐.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던 나도 이제는 산에 오르는 것이 즐겁다고 주변에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잔뜩 땀을 흘리고 나서 맞는 산 바람이 얼마나 상쾌한지 알아?"
"발아래 세상이 펼쳐지면 산 아래 고민은 작은 것이 된다니까?"
동네 뒷산은 어림잡아도 스무 번은 넘게, 국립공원도 열다섯 번 정도 다녀왔으니 이제 이 정도 폼은 잡아도 되겠거니 싶었다. 마침 아이와 남편이 지리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기에 나도 가겠노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지리산 국립공원 천왕봉에 간다니. 단풍이 멋진 계절에 백무동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야간에 산행을 해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려는 멋진 계획이다. 넘쳐흐르는 낭만에 마음이 울렁울렁 거린다.
이제부터는 천왕봉 프로젝트다. 러닝도 하고 동네 산도 열심히 오르내리며 훈련을 했다. 몇 번이나 천왕봉 일출 사진을 찾아봤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샌들을 신고 계단을 오르다가 계단 모서리에 오른쪽 네 번째 발가락을 세게 부딪혔다.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야 괜찮겠지 했는데 멍이 가시지 않고 자꾸 부어오르는 것이 영 찜찜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퉁퉁 부어오르고 통증도 있어서 정형외과에 가보니
발가락 골절.
발가락에 테이핑을 하고 3주가 넘게 있었는데도 뼈가 안 붙는다. 매일 가는 물리치료도 꾸준히 먹는 칼슘도 소용없다. 천왕봉은 저리 가고 동네 슈퍼도 못 가고 내내 소파에만 누워있었다. 눈물이 났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멱살 잡혀 끌려간 산이었지만, 이제는 산이 가진 매력에 잔뜩 끌렸는데 이런 식으로 산에 못 가게 되다니. 슬프고 속상했다.
우리 가족이 계획했던 당일 무리해서 백무동 야영장까지는 따라갔다. 나는 텐트를 지키고 아들과 남편은 새벽에 천왕봉으로 향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오기 잘했다. 비록 천왕봉은 못 가도 단풍이 익어가는 지리산에 있는 게 집 소파에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 부상은 없다!"
어떤 운동을 잘하기 위해 다른 운동을 해보는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데 잘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 자연히 다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돌아와서 등산 스틱을 샀다. 무릎 보호대도 샀다. 발목 강화 운동에 좋다는 보수볼 운동도 열심히 했다. 필라테스 선생님께도 특별히 발목 강화 운동을 부탁드렸다.
동네 산에 가면서 스틱에 무릎 보호대에 뭐에 잔뜩 챙겨 다니는 사람들이 오바스럽다고 생각했던 나를 무지하게 혼내주고 싶다.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등산화는 당연히 신어야 하고 스틱과 무릎 보호대는 무릎 관절에 하중을 엄청나게 줄여준다. 템빨이라고 흉볼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오래 하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날 이후로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부상은 없다. 그리거 그 이듬해 제2차 천왕봉 프로젝트를 통해 드디어 나도 아이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