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순이 : 캐나다 5년 살이(5)
코로나와 나의 육아 해방
캐나다의 내가 살던 도시는 어린이집 비용이 비쌌다. 물론 지금은 정부가 바뀌면서 어린이집 비용이 당시보다는 조금 떨어졌지만, 나는 그 혜택을 1년도 채 누리지 못했다. 처음 갔을 때, 지인이 추천해 준 어린이집 비용은 한 달을 풀타임으로 보내려면 한국돈으로 계산하면 200만 원 남짓 아무리 싼 곳도 1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가격이 200만 원이 넘어도 한국에서 큰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들에 비교하면, 내가 느끼는 심리적 가격은 훨씬 더 비쌌다.
어린이 집이 비쌌지만, 큰 애는 둘째를 낳으면서 어쩔 수 없이 빨리 어린이집에 보냈다. 노산인데 아이 둘을 집에서 혼자 다 돌보기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캐나다에 왔으니 큰 아이가 영어라도 배우기를 바랐다. 한국에서 영어유치원을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영어유치원 보낸다고 생각하고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하지만, 둘째마저 보내면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둘째는 아주 오래도록 집에 데리고 있었다.
둘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 예뻤기에 집에 데리고 있는 동안에도 둘째는 계속 예뻤다. 돌니 훨씬 넘어서까지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 다녔다. 내가 인간 캥거루 같다고 생각했다. 몸은 고됐지만, 아이가 너무 예뻐서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보석이 나에게 왔나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모든 것을 잊고 물고 빨고 지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갔다. 큰아이 학교 적응 돕고, 둘째 아이 모유 수유하고, 김치 만들고, 밥하고, 도시락 싸고, 빵 굽고, 아이들 책 읽어주고, 도서관 데리고 가고, 혼자 둘을 물놀이장 데리고 가고, 놀이터 데리고 나가며. 집에서 함께 무언가 만들고 그리기도 하고, 틈틈이 집 정리 청소도 하고, 그 사이 육아책, 심리학책, 경제 재테크 책도 읽으면서, 나의 모든 힘과 정성을 아이들과 집안일에 쏟았다. 그리고 틈틈이 나를 위한 독서를 했다. 남편은 거의 집에 없었기에 애들과 나, 셋이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워내며 둘째가 조금 커져서 지역의 어떤 운동모임에 들어갔다. 큰 아이 학교 근처에 무료 ESL수업을 교회에서 한다고 들어서, ESL수업을 들으려고 갔다. 안을 둘러보니 체육관이 있었고, 사람들이 운동을 했다. ESL보다는 운동모임이 재미있어 보였다. 그 운동모임은 9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주로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었고, 일부는 교회에 안 다닌다고 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운동 모임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봤다. 흔쾌히, 모임에 참여해도 좋다고 얘기를 해주었고, 나는 ESL수업 대신에 운동 모임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둘째를 데리고 그곳으로 운동을 하러 갔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다 ESL수업을 들었지만, 나만 운동을 하러 갔다. 운동 모임의 대다수는 아이엄마들이었다. 돈을 조금 내면 운동하는 동안 교회의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봐주었다. 이것이 너무 기뻤다. ESL수업은 아이와 함께 들었기 때문에 중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를 여러 번 했고, 나는 이런 순간마다 땀이 났고,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운동 모임 시간 동안에 아주 짧게나마 아이로부터 해방되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운동 모임은 모두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나만 유일한 아시안여성이었다. 성인이 되어 타국 생활을 하는 사람도 유일하게 나 혼자였다. 나 빼고는 다 캐나다가 고향이었고, 콜럼비아 출신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나중에 얘기를 하다 보니 콜럼비아에서 고등학교 때 이민 와서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한 친구였다. 운동하면서 이 친구가 나에게 소개해준 책을 읽고, 그 후로 내 인생은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이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 헌팅하는데 데리고 가줘서 산에 가서 크리스마스트리 헌팅도 해왔다.
운동 모임에 있는 여자들은 다들 체격이 좋았다. 근육질에 키도 컸다. 큰 사람들은 키가 180은 되는 것 같았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그녀들은 키가 참 커서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작은 여성은 몇 명 없었다. 체격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도록 운동한 여성들과 같이 운동을 하게 되어 설레기도 하고 신기했다. 나는 둘째를 낳고, 6개월 지난 시점부터는 아기와 함께하는 필라테스나 기구운동을 지역 커뮤니티 센터에서 꾸준히 했었다. 아이를 안고 아이의 무게를 기구처럼 이용하면서 운동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돌이 지나면 아이들이 움직임이 많아져서인지, 아이와 엄마가 함께하는 운동 프로그램은 12개월이 지니면 없다. 운동이 하고 싶은데, 비용이 부담되어서 아이 12개월부터 잠시 멈추고 있던 때였는데, 운동 모임에서 다시 운동을 하게 되어 신났다.
다 같이 모이면 일단 몸풀기 운동을 한다. 농구, 하키, 축구 그냥 달리기 등으로 편을 나눠서 워밍업을 하고, 아주 강한 강도의 부트캠프 스타일의 운동을 하는 것이 운동모임의 운동이다. 나는 그 크고 덩치 좋은 백인 여자들과 워밍업 운동에서 농구 골도 몇 번 넣었고, 하키 골도 넣어가며 신나게 운동을 했다. 너무 행복했다. 그 행복은 달콤했지만 너무 짧았다. 중간에 크리스마스가 있었고, 열흘 가량 한국을 방문했다가 다시 캐나다로 갔다. 다시 운동 모임에 나갔고, 세 달 조금 넘게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 환자와 사망자들이 생겼다. 그 시기 즈음 홍콩에서 캐나다로 온 친했던 친구 가족이 한 달이 넘도록 고열과 기침으로 죽도록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증상만 들으면 코로나와 똑같았다. 선교를 하러 중국에 갔던 사람들이 대거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캐나다에도 코로나가 퍼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때가 2020년 1월 말이었다.
2020년 3월 16일부터 캐나다에 내가 있던 도시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17일부터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를 하는 위주의 가정학습을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도시의 모든 학교가 등교를 중지했다. 아이는 어렸기 때문에 짧은 시간만 온라인 학습을 했다. 아주 길고 긴 숙제리스트가 담임 선생님에게 이메일로 왔고, 내가 다 가르치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른 숙제를 제출해야 했다. 두 돌 쟁이를 데리고, 학습에 흥미가 없는 아이를 데리고 온라인 학습을 하는 시간 동안 나의 피로가 집중적으로 누적된 것 같다. 그 시간을 이제와 되돌아보면, 조금 힘들었다.
말 안 통하는 두 돌배기 둘째는 큰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큰 아이는 한국 나이 7살. 아직 어렸고, 아이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해서 아이는 내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둘째는 두 돌. 혼자 있지를 못했다. 둘을 분리하기도 힘들었고, 온라인 수업은 진행해야 했고. 큰 아이가 Kindergarten으로 어렸기에 온라인 수업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 짧고 몇 번 안 되는 줌미팅에 불쑥불쑥 둘째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선생님은 반갑게 둘째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해주셨지만,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아이의 공식적인 학교 수업을 사생활이 방해하는 느낌. 그 방해하는 아이가 우리 집 두 돌배기 둘째. 내 아이라는 사실. 물론, 그 학교는 우리가 2년 차로 다니는 학교였고,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부모, 아이들이 우리 둘째를 알았지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다르고, 사생활이 공적인 생활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나에게 그런 순간순간은 마음 불편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조기 방학을 하던 날 가스 활명수 한 병을 단번에 마신 듯 가슴이 뻥 뚫어지게 편했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남편은 그때도 출근을 했다. 회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택을 하며 오피스에 나오지 않았으나, 남편은 오피스에 갔다. 어쩔 수 없이 아주 짧게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재택기간이 있었고, 혹은 오피스에 나갔다가 주변의 누군가가 확진이 되어서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기간이 있었지만, 남편이 있었다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시간들이 더 편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챙겨야 할 사람이 늘어서 바빠졌다. 남편에게 꼬박꼬박 밥에 물에 간식을 챙겨가며, 집중력이 낮은 큰애의 온라인 수업과 숙제를 돕고, 외출을 못해 답답해하는 어린아이들 두 명을 즐겁게 하는 놀이들을 만들어 내는 일. 이 일들이 때로는 즐겁고 성취감을 주며 괜찮았지만, 때로는 늘 에너지 넘치던 나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 코로나가 하나의 기회처럼 다가온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로 어린이 집 대기가 줄어서 껌처럼 3년 가까이 나에게 붙어 있던 둘째를 어린이 집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보내고 싶었던 어린이집에 100명 넘던 대기가 사라졌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 둘째는 운 좋게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어린이집 부원장님인 낸시가 절대 우리 둘째가 못 들어올 거라고 호언장담 했지만, 내가 사람일은 모른다며 난 당장 보낼 테니 전화해 달라고 말하기를 몇 번, 결국 우리 둘째는 3년이 지나도 자리가 안 생길 것이라고 말했던, 내가 보내기를 원하던 어린이집에 자리가 나서 들어갔다.
코로나 이후 나에게 더 획기적인 기회는 온라인 세상이 열린 것이다. 한국의 모든 모임들은 대면으로 이루어지다가 코로나 이후로 줌 미팅이 활성화되면서 온라인 연수들이 생겼다. 온라인 세상에 관심이 없던 나도 6년 동안 만들어 가지고 있던 인스타를 다시 시작했고, 온라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 석사 논문의 연구 방법론을 만화로 그려놓은 어떤 교수님의 인스타를 보게 되었다. 그 교수님이 그 연구 방법론을 가지고 특강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 연수를 듣고 싶어서 신청을 했다. 캐나다 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는 연수였지만 시간이 대수랴. 나는 올빼미인걸.
어린이집에 아이가 가고 나서 한두 달은 병원 다니고, 좀 쉬었다. 그러면서 슬슬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까 말한 콜럼비아 친구가 소개해준 책을 읽고, 그 책을 한참 따라 하던 중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더 집중하고 내가 나와 대화하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내가 아쉬워서 내뱉는 말들을 곰곰이 씹어보기도 하며 내가 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던 중, 한국에서 진행된 내 석사논문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연수는 나를 더 한번 뒤흔들어 놓았다.
연수를 듣기 위해 그 교수님께 내 신원을 증명하고자 내 석사논문을 링크로 보냈다. 그 교수님은 내 논문을 읽어보시고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흥미 있는 주제예요. 박사 주제로도 좋겠어요.” 석사 논문이 괜찮게 쓰였다는 칭찬과 함께. 연수가 끝나고 나는 일부러 줌 미팅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교수님과 사적으로 이야기가 나누고 싶었다. 그 교수님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수님은 나에게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박사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나는 가족은 항상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점이라서 아이들 때문에 남편과 떨어져 살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어떻게 3년만 떨어져서 코스웍만 하면 좋을 텐데…”
줌 미팅을 끝내고 밤을 새웠다. 거의 10년 동안 논문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박사공부가 늘 하고 싶었지만, 내 석사시절 지도교수님은 남학생을 선호했고, 남편은 기회비용을 이야기했다. 친정엄마는 내가 박사 공부를 못하게 20년째 말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사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애써 외면하면서 지냈다. 2017년에 유럽의 국제학회에 발표하러 갈 수 있는 기회도 남편이 짜증 내는 한마디에 단칼에 거절해 버린 나. 그런 내 모습에 오래도록 후회하며 지내던 터였다. 이제라도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면, 내 후회가 70살이 된다고 한들 없어질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 후회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