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지난 1년간의 여행은 내게 수십 편의 영화를 선물했다. 때로는 심장이 멎을 듯한 스릴러였고, 때로는 눈물 나게 아름다운 멜로드라마였다. 지금부터, 내 영혼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10편의 단편 영화를 여기에 공개한다.
# SCENE 1.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거기서 뭘 하는 거지(¿Qué haces ahí)?”
등 뒤에서 나직하지만 날카로운 스페인어 목소리가 꽂혔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20대로 보이는 마른 체격의 사내가, 마치 서부 영화의 총잡이처럼 서 있었다. 왼손은 나를 향해 삿대질하듯 뻗어 있었고, 오른손은 권총이 있을 법한 뒷주머니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곳은 엘살바도르, 한때 인구 10만 명당 살인율이 대한민국의 150배에 달했던, 악명 높은 갱단 MS-13의 나라.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뒷주머니에 든 것이 총이 아니라면, 이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교도소 수감된 갱단]
# SCENE 2. 낯선 자의 도시
수도 산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때부터 공기는 무거웠다. 나는 스페인어 실력을 총동원해 택시 기사에게 안전한 지역과 위험한 지역, 그리고 믿을 만한 맛집 정보를 꼼꼼히 물었다. 여행의 원칙은 단호했다. ‘안전지대(Colonia San Benito)에 비싼 숙소를 잡되, 탐험은 겁내지 말자.’
나는 도시를 여행할 때, 먼저 가장 먼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부터 숙소 방향으로 걸어오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루 2~3만 보를 걸으며 관광지는 물론, 현지인의 삶이 녹아있는 골목과 재래시장 구석구석을 누빈다. 관광과 운동, 그리고 생생한 현장 체험까지.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그날도 나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의 모습을 닮은 거리,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래시장의 활기. 작은 카메라(오즈모 포켓)로 이 생생한 풍경을 담으며 낯선 주택가에 접어든 순간, 그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운 것이다.
# SCENE 3. 10초간의 대치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침착하자. 저 친구를 자극하면 안 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냥… 관광객이야. 여기 지나가는 중이었어.” “손에 든 건 뭐지?”
그의 눈은 내 손에 들린 작은 카메라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구역을 촬영하는 경쟁 조직원이나 경찰의 끄나풀로 오해한 듯했다. 잘못하면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는 상황.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 이거? 그냥 카메라야. 미안, 당장 끌게.”
내가 황급히 카메라 전원을 끄는 순간, 기적처럼 다른 행인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그 덕분이었을까. 사내는 더 이상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SCENE 4. 삶의 맛, 최고의 스테이크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역설적으로 강렬한 허기가 몰려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에게 허락된 본능,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였다. 나는 미친 듯이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맸고, 숙소 근처에서 운명처럼 한 스테이크 식당을 발견했다.
거대한 화덕에서 참나무 장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종업원의 추천으로 통 안심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잠시 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스테이크’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고기를 한 점 베어 무는 순간, 진한 참나무 향과 함께 육즙이 입안에서 폭발했다. 거기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아… 내가 살아서 이런 맛있는 걸 먹는구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스테이크를 먹어봤지만, 그날의 그 맛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절대적인 맛이었다. 생명의 위협 끝에 맛본, 삶의 맛.
그래, 이것이 진짜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