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지 말았으면
앞서 나는 105개국을 돌아본 끝에,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왜 스스로를 ‘헬조선’에 사는 ‘경주마’라 부르는가? 지금부터,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울타리, 눈가리개, 그리고 채찍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 바꿀 수 없는 울타리: 기후
나이가 들수록 춥고 긴 겨울이 싫어진다. 10월 말부터 시작되어 4월 초까지 이어지는, 1년의 절반에 가까운 추위. 아마도 12월의 겨울 바다에 발가벗겨진 채 던져졌던 군대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씨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울타리다. 시베리아가 아닌 것에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둘째, 서로를 향한 가혹한 눈가리개: 비교 문화
진짜 문제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있다. 바로 ‘비교’라는 이름의 잔인한 눈가리개다.
대한민국은 객관적으로 부유하고, 불평등도 서구에 비해 적으며, 굶어 죽을 걱정은 없는 나라다. 하지만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왜일까? 우리는 절대적인 나의 행복을 보기보다,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단 한 조각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돈은 없지만 사랑이 넘치는 신혼부부는, 가정불화로 고통받는 옆집 부자의 ‘돈’만 보고 부러워한다. 우리는 스웨덴의 높은 불평등이나 살인적인 물가는 보지 않고, 그들의 ‘복지’라는 환상만을 가져와 우리의 현실을 비난한다. 이 눈가리개를 끼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세계여행은 내게 이 지긋지긋한 눈가리개를 벗어던질 용기를 주었다.
셋째, 영혼을 멍들게 하는 채찍: 존대어와 서열 문화
그리고 우리를 경주마로 내모는 가장 아픈 채찍이 있다. 바로 ‘존대어’와 그로 인해 파생된 ‘서열 문화’다.
‘동방예의지국’? 아름다운 말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한국의 존대어는 소통의 벽을 쌓고 관계의 문을 닫는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 이름 대신 나이와 직급부터 묻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서열이 정해지는 순간, 수평적인 친구가 될 가능성은 사라진다.
벨라루스행 비행기에서 만난 22세의 터키 청년 리가즈. 우리는 나이의 벽이 없는 영어로 대화했고, 8일 내내 함께 클럽에서 청춘을 불태우는 친구가 되었다. 한국에서 50대 아저씨와 20대 학생이 이럴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이 존대어라는 채찍은 어김없이 ‘꼰대’와 ‘아부’를 낳는다. 상사에게 “선배님” 대신 반말을 쓰게 했던 히딩크 감독의 일화는, 우리의 서열 문화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회사에서 나는 상사를 ‘모시고 근무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표현을 쓰는 동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하는 주체적인 ‘나’이고 싶었다. 당연히 승진에서는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승진이라는 경주로를 이탈한 덕분에, 나만의 놀이터에서 훨씬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인생을 만들 수 있었다. 인생의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증명해왔다.
나이가 들수록 서러운 것은, 나는 여전히 젊은 영혼인데, 젊은 친구들이 나를 ‘어르신’이라는 존대어의 감옥에 가둔다는 것이다. 존대어가 진정한 공경을 의미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이 들어 돈 없으면 그 어떤 존댓말보다 더한 무시를 당할 뿐이다.
나는 꿈꾼다. 나이, 직업,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 동등하게 존대하거나, 격의 없이 평어를 사용하는 평등한 관계를.
결국, 내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한국 사회생활은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관계’가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