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쓰여진 마음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을 때

by 불가사리


모든 직장 생활의 시작과 끝은 여의도였다.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옥상에 오르지 않는 이상, 온전한 하늘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출근길의 지하철은 늘 붐볐고, 사람들의 등만 보며 앞으로 걸었다. 행여 앞사람의 교통카드가 중복이 되어, 개찰구에서 시간이 지체될 때면 바로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바닥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에 살게 되면서 두리번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시내에 높은 건물이 있어도, 넓은 대로 때문인지 하늘이 잘 보였다. 집과 집 사이 놀이터, 공원은 조화롭고 넓은 공터가 많다. (한국이라면 이미 아파트가 들어섰을 것 같은 땅들) 내게는 그곳이 버려진 땅이 아닌, 이 도시의 여백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바닥을 살피게 됐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닥에 갈색의 작은 열매가 보였다.

“엇, 도토리다!”

귀여운 도토리들이 빼곡히 도로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높게 자란 도토리나무들이 담장 너머로 나와있었다. 도토리 나뭇잎들이 길 옆의 잔디에 가득 떨어졌다. 한 알 한 알 줍다 보니, 한 손 가득 도토리로 꽉 찼다. ‘아- 옛 싸이월드 시절엔 이 도토리로 방도 꾸미고, 음악도 샀는데...’ 지난 추억을 떠올리다가, 서울의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이걸로 뭐든 사줄게.”
“ㅎㅎ 언제 적 이야기야. 러시아 도토리 실하다. 필요한 거 적어 보낼게 ㅋㅋ”

도토리 사진 한 장으로 소환된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일상의 대화도 했다가, 마지막은 ‘아, 보고 싶다.’로 마무리된다. 바닥에서 발견한 작은 도토리 덕분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로, 한국의 친구와 서로의 그리운 마음을 주고 받은 날


그 후, 공원을 산책할 때엔 바닥을 더 꼼꼼히 살피게 됐다. 혹시 자연이 준 선물들이 행여나 있을까, 내가 놓친 작은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봐. 그런데 어제는 없던 문장 하나가 바닥에 쓰여 있었다. 함께 산책하던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스쿠차유가 뭐야?”
“야 스쿠차유, 리즈. - 그리워 리즈. 라고 쓰여있네.”
“어머, 누가 써놓은 걸까? 설마 광고는 아니겠지? 선영아 사랑해 같은.”
“광고는 아닌 거 같은데. 누가 장난친 거 아닐까?”

공원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또 하나의 문장을 발견했다.

“어머. 오친(매우, 몹시) 이 붙었어.!”
“너무너무 그리워. 리즈.”
“이거 장난은 아닌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짠하다.”

누군가 전하지 못한 마음을 바닥에 써둔 걸까. 리즈는 우리 아파트에 살지도 몰라. 지난밤 그는 몰래 공원에 자신의 마음을 써두었고, 매일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리즈가 이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 건 아닐까. 아. 리즈 꼭 그의 마음에 답해줘요. 나의 마음은 이 문구를 쓴 누군가에 닿고 있었다.


공원에서 만난 바닥에 쓰여진 마음. 두번째 문장에선 마음이 너무 찡해졌다. <리즈, 네가 너무 너무 그리워>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은 몇 번을 전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 날, 나는 누군가가 바닥에 쓴 마음으로 ‘그리워하다 скучать' 는 러시아 동사를 알게 됐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동사를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이 하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코로나로 인하여 어학교 수업이 온라인으로 바뀌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지금. 우리는 언제 예전처럼 함께할 수 있을까? 곁에 없는 친구들에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새해인사를 전하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


“야 오친 스쿠차유 찌베 - 나는 네가 몹시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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