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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Apr 06. 2021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본 요론섬 | 팥빙수


아침 일찍 요론섬으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미리 잡아 둔, 항구 옆 숙소에 도착했다. 예약한 성을 보고 한국인이라 생각했다는 주인이 우리를 반겼다.​


“아내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요. 그래서 같이 많이 봤어.”

조만간 꼭 아내와 한국에 갈 거라는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친구와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 6시 아저씨의 모닝콜로 눈을 떴다. 이른 아침이라 조식은 괜찮다고 했지만 손수 싸주신 주먹밥과 녹차를 챙겨서 페리를 탔다. 큰 배는 안정적으로 바다를 가르며 요론섬에 도착했다.

“꼭 와보고 싶던 곳인데, 진짜 오다니 꿈만 같아.”

“바다에서 메르시 체조(영화 안경에 나오는 체조)를 해야 해.”

영화 <안경>의 촬영지로 유명한 요론섬, 당시만 해도 한국의 인터넷엔 정보가 없던 시절이라, 야후 재팬의 블로그를 열심히 찾아서 정보를 수집했다. 숙소도 영화에 나온 곳으로 찾아서 예약했다.

“너희가 여기에 온 두 번째 한국 손님이야.”

“아쉽네요. 처음이면 좋았을 걸!”

“아, 잠깐. 그러고 보니 그 한국인은 일본에 산다고 했는데.”

“저희는 서울에서 왔어요!”​


주인은 우리에게 숙소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다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던 장소도, 영화에 나온 강아지도 그대로였다. 여주인공 타에코가 머물던 방은 집주인 내외가 쓰고 있지만, 거의 같은 형태의 다다미가 우리의 방이다. 짐을 풀고, 자전거를 빌려서 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에메랄드빛 바다, 초록 초록한 잎사귀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바바리 재킷을 걸치기 시작한 서울이었지만, 남쪽나라인 이 곳은 여전히 여름이 머물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다 보니 땀이 났다. 작은 가게에 들러 물을 사서 나왔는데, 친구의 자전거 앞 바구니에 맥주가 두 캔 놓여있었다.

“방금 가게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넣어 주셨어.”

얼음같이 차가운 맥주를 햇빛에 달아오른 양 볼에 댔다. 귀한 맥주는 저녁에 먹기로 하고, 우리는 차가운 걸 먹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 얼음(氷)라고 쓰인 천이 펄럭이는 빙수집을 발견했다. 영화 <안경>엔 팥빙수가 나온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 지쳐 요론섬을 찾은 타에코는, 숙소의 부엌에서 팥을 졸이던 할머니 사쿠라를 만난다. 그녀는 말한다. “大切なのは、焦らない事. (팥을 졸일 때)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눈 앞에 놓인 팥빙수를 보니 영화 속 사쿠라 할머니가 생각났다. 잘게 갈린 얼음과 천천히 졸여진 팥을 조심스레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일로 지쳐버린 마음을 식혀주었다. 휴가가 끝나면 다시 또 시간에 쫓기는 바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지금은 조급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야지.


Yoronjima, Japan _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 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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