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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수프

러시아 | 보르쉬

by 불가사리

처음으로 보르쉬를 먹은 건, 남편과 연애하던 당시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였다. 시차와 급격한 온도차에 아슬 아슬 감기 기운이 돌던 내게 그가 추천한 음식이 보르쉬였다. 러시아 음식이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을 거라며, 소고기 뭇국과 같은 맛이 날 거라고 했다. 붉은 비트를 넣은 탓에 상상했던 맑은 소고기 뭇국이 아니라 망설였지만, 수저를 들어 한 입을 넣고 깜짝 놀랐다. 감칠맛이 나는 고기 육수에 채를 썰어 푹 익힌 무와 양배추가 씹혔다. 수프라기보다는 한국의 국과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날씨도 풍경도 모든 게 낯선 러시아에게 처음으로 작은 공통점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음식을 즐겨 먹는 나라라면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하얀 크림은 뭐야?"

"스메타나라고, 러시아식 샤워크림이야. 보르쉬에 넣어서 먹는 거야."



호기심에 살짝 포크로 찍어 맛을 본 샤워크림은 시큼한 맛이 났다. 멕시코 음식점에서 먹던 샤워크림은 내게 이국적인 소스였다. 채소를 찍어 먹거나, 화이타를 먹을 때 겸하는 소스를 국에다 넣는다니, 나는 그의 조언을 따라 스메타나를 보르쉬에 넣었다. 붉은색이었던 국은 바로 분홍색을 띄었다. 마치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 보던 마녀의 마법수프처럼 먹으면 이상한 초능력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붉은색의 보르쉬를 분홍색으로 만드는 스메타나, 슈퍼마켓에서 지방 함량 별로 구할 수 있는 스메타나를 러시아인들은 무척 사랑한다. 러시아식 만두(펠메니)를 먹을 때도, 치즈케이크(씨르니키)에도, 스메타닉이라는 스메타나를 활용한 케이크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 또한 스메타나를 즐기게 됐다.



절기상으론 봄이었지만 종종 눈이 내리던 러시아의 3월, 흐린 하늘에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 러시아어 학교의 식당 메뉴에서 붉은색의 보르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보르쉬를 받기 위해 서 있자 음식을 담아주던 분이 물었다.



"스메타나 넣을 거예요?"

"네! 넣어주세요!"



작은 트레이에 샐러드, 치킨가스, 파스타를 담고 보로쉬 한 그릇까지 200 루블(약 3000원), 이 보다 더 좋은 점심식사가 어디 있을까. 붉은색의 보르쉬에 하얀 눈처럼 덮인 스메타나 한 덩이를 수저로 휙휙 저었다. 금세 분홍색의 마법수프가 됐다. 몸도 마음도 추웠던 날, 따끈한 보르쉬를 한 입 먹으며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린다. 굳은 표정의 러시아인, 배워도 배워도 어려운 러시아어, 이 땅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때 보르쉬를 먹으며 처음 내게 말을 걸어준 러시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한국의 소고기 뭇국과 닮은 러시아의 보르쉬, 분홍 수프를 먹으며 봄을 기다린다.



IMG_3105.jfif Moscow, Russia _ 하얀 눈처럼 스메타나를 얹은 보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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