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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May 03. 2021

분홍색수프

러시아 | 보르쉬

처음으로 보르쉬를 먹은 건, 남편과 연애하던 당시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였다. 시차와 급격한 온도차에 아슬 아슬 감기 기운이 돌던 내게 그가 추천한 음식이 보르쉬였다. 러시아 음식이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을 거라며, 소고기 뭇국과 같은 맛이 날 거라고 했다. 붉은 비트를 넣은 탓에 상상했던 맑은 소고기 뭇국이 아니라 망설였지만, 수저를 들어 한 입을 넣고 깜짝 놀랐다. 감칠맛이 나는 고기 육수에 채를 썰어 푹 익힌 무와 양배추가 씹혔다. 수프라기보다는 한국의 국과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날씨도 풍경도 모든 게 낯선 러시아에게 처음으로 작은 공통점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음식을 즐겨 먹는 나라라면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하얀 크림은 뭐야?"

"스메타나라고, 러시아식 샤워크림이야. 보르쉬에 넣어서 먹는 거야."



호기심에 살짝 포크로 찍어 맛을 본 샤워크림은 시큼한 맛이 났다. 멕시코 음식점에서 먹던 샤워크림은 내게 이국적인 소스였다. 채소를 찍어 먹거나, 화이타를 먹을 때 겸하는 소스를 국에다 넣는다니, 나는 그의 조언을 따라 스메타나를 보르쉬에 넣었다. 붉은색이었던 국은 바로 분홍색을 띄었다. 마치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 보던 마녀의 마법수프처럼 먹으면 이상한 초능력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붉은색의 보르쉬를 분홍색으로 만드는 스메타나, 슈퍼마켓에서 지방 함량 별로 구할 수 있는 스메타나를 러시아인들은 무척 사랑한다. 러시아식 만두(펠메니)를 먹을 때도, 치즈케이크(씨르니키)에도, 스메타닉이라는 스메타나를 활용한 케이크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 또한 스메타나를 즐기게 됐다.



절기상으론 봄이었지만 종종 눈이 내리던 러시아의 3월, 흐린 하늘에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 러시아어 학교의 식당 메뉴에서 붉은색의 보르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보르쉬를 받기 위해 서 있자 음식을 담아주던 분이 물었다.



"스메타나 넣을 거예요?"

"네! 넣어주세요!"



작은 트레이에 샐러드, 치킨가스, 파스타를 담고 보로쉬 한 그릇까지 200 루블(약 3000원), 이 보다 더 좋은 점심식사가 어디 있을까. 붉은색의 보르쉬에 하얀 눈처럼 덮인 스메타나 한 덩이를 수저로 휙휙 저었다. 금세 분홍색의 마법수프가 됐다. 몸도 마음도 추웠던 날, 따끈한 보르쉬를 한 입 먹으며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린다. 굳은 표정의 러시아인, 배워도 배워도 어려운 러시아어, 이 땅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때 보르쉬를 먹으며 처음 내게 말을 걸어준 러시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한국의 소고기 뭇국과 닮은 러시아의 보르쉬, 분홍 수프를 먹으며 봄을 기다린다. 



Moscow, Russia _ 하얀 눈처럼 스메타나를 얹은 보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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