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마이 | 땡모반
아침이 찾아오는 게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만약 인생을 편집할 수 있다면 통째로 덜어내고 싶은 계절, 그 해 여름이 그랬다. 매일 전쟁터에 가는 심정으로 출근길 버스틀 탔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아 더 씩씩하게 굴었다. 화를 내고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잔뜩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버텼다. 간신히 두 계절을 견디고 있을 무렵 친구 둥둥이가 말했다.
“우리, 겨울에 치앙마이에 갈래요?”
태국의 북부 치앙마이, 각자 다른 이유로 마음이 고단했던 우리는 큰 고민 없이 가장 저렴한 티켓을 끊었다. 12월 중순, 우리는 중국 베이징을 경유하여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하쿠나가 먼저 치앙마이에 도착했고, 직접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우리를 맞았다.
“웰컴 투 소규모 작당”
소규모 작당은 당시 셋(지금은 넷)이 함께하는 작은 글쓰기 모임이다. 한 직장에서 만난 우리는 일을 하고 출장을 함께 다니며 많은 낮과 밤을 보냈다. 회사에서 써야만 하는 보고서, 제안서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한 달에 두 편, 마감이 있는 작은 글쓰기 모임을 열었다. 말이 아닌 글로 만나는 동료는 몸은 멀리 있어도 가깝게 느껴졌고, 그냥 스쳐가는 사이로 남지 않게 됐다.
치앙마이를 잘 아는 하쿠나 덕분에 여행의 모든 일정은 순조로웠다. 베이징 공항을 경유할 때까지 입고 있던 두터운 카디건은 여름의 나라에서는 필요 없었다. 원피스와 샌들을 신고 골목을 거닐고, 초록이 우거진 나무들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동네의 작은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고, 다양한 종류의 장미꽃이 만개한 공원을 산책하며 또 한 번의 여름을 맞았다.
한국에서 보낸 그해 여름은 지우고 싶은 기억뿐이라, 치앙마이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이미 나에게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여름의 기억을 하나 더 가져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번 여름으로 지난여름을 덧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꽁꽁 감춰두었던 상처는 조금씩 빛을 쬐고 괜찮아질 거라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싱그러운 초록의 식물들이 가득한 카페에 앉아 땡모반을 한 잔 시켰다. 한국에선 제철을 잃은 여름 과일, 수박을 시원하게 갈아서 나온 음료가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 잘 익은,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충분히 보낸 수박은 그 자체로 충분히 달고 맛있다. 단숨에 땡모반을 들이켰다. 힘들었던 여름을 다시 덮어쓰고 싶어서, 내게 도착한 활기찬 두 번째 여름의 기운을 내 안에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