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게센누마 | 미역 샤브샤브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다시 출장으로 도쿄에 왔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1년, 일하고 있는 국제개발기구 일본 사무실의 사업 보고 초청이었다. 초대에 응한 나라는 많지 않았다. 방사능 위험에 대한 보도가 조금씩 나오던 때라,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꽤 많은 후원금을 지원한 한국의 경우, 후원자들에게 보고할 콘텐츠가 필요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현장을 담기 위해 이 곳에 왔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3시간을 달렸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재난이 덮친 현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온 곳은 미야기현의 바닷가 마을 게센누마. 일 년 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의 피해가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였다. 가는 길 곳곳 여전히 남겨진 건물의 잔해, 복구 중인 흔적을 봤다. 생각했다. 일본이 이 정도라면,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다른 나라의 재난은 회복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사고 당시 시간에 멈춘 시계였다. 어업이 주요 생계수단이던 마을의 냉동창고는 처참히 부서졌고 마을 사람들은 1000톤 이상의 생선이 부패되는 걸 눈 앞에서 봐야 했다.
“지진 경보가 울려서 대피한 지, 20분 후 바로 쓰나미가 닥쳤어요.”
“검은 물에 모든 게 휩쓸려 가던 순간이 여전히 꿈에 나옵니다.”
말하는 그들 뒤로 검푸른 바다가 보였다. 이 마을이 낯설지 않았다. 바다 근처 외갓집의 풍경과 닮았다. 여름방학이면 외삼촌의 배를 타고 나갔던 깊은 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너른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곤 했다. 모든 걸 품어주던 바다가 그들에게 몰려왔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이 잘 안됐다.
후원금으로 이재민의 삶을 지원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재난 이전과 같을 순 없어도 주민들의 삶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그들의 생계가 되는 어업을 다시 시작하도록 배, 냉동창고, 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리는 한 주민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는 검푸른 바다에서 양식 중인 미역을 힘껏 건져 올렸다. 다시 육지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를 위한 한 상을 차렸다. 직접 채취한 미역, 톳, 해조물이 데쳐지고, 한쪽에선 뜨끈한 된장국이 끓고 있었다.
"미역 샤브샤브, 먹어보세요."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밥과 미역이 담긴 그릇을 건넸다. 순간 멈칫했다. 먹어도 괜찮을까? 방사능에서 안전한 걸까? 바다가 삶의 터전인 그들 앞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미안했다. 고개를 돌리니, 같이 출장을 온 구호팀의 동료가 보였다. 그는 고봉밥처럼 쌓인 미역을 받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불가사리, 맛있어. 먹어봐.”
심지어 그는 그들 앞에서 엄지를 치켜올렸다. 음식을 대접한 이에겐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을까.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내가 겪지 못한, 그들이 통과한 일 년의 고된 마음을 어떤 말로 어루만질 수 있을까. 용기를 냈다. 그들의 삶이었던 바다,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 바다, 모든 시간을 함께한 바다가 길러낸 귀한 미역을 나는 꼭꼭 씹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앞으로도 바다와 함께 살아갈 그들의 삶을 마음 깊이 응원하고 싶었다.
매 해 생일을 맞아 미역국을 먹을 때면, 그 날의 미역 샤브샤브가 생각난다. 동일본 대지진/쓰나미가 일어난 날이 2011년 3월 11일, 그때 태어난 아이는 열살이 넘었다. 당시 재난전문가들은 완벽한 회복을 위해서 10년의 시간은 더 걸릴 거라고 했는데, 지금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재난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