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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30. 2022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간

일본 도쿄 | 차완무시 

‘나의 경력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건 아닐까.’ 느꼈던 때가 있다.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가기 전 방송작가로 일했지만, 아이템을 찾고 자료를 수집하고, 출연자를 섭외하고, 대본을 썼던 일들은 언어가 바뀐 나라에선 쓸모없는 경험이 되었다. 읽고 쓰며 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일본어로는 한국에서 했던 일을 똑같이 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고급 수준의 일어 실력이 필요 없는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기분이 울적했던 어느 날, 그녀가 생각났다. 용기를 내어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하죠! 도쿄에 왔군요! 우리 만나요!”      


이케다상은 후지텔레비전의 프로듀서다. 일본에 오기 전, 그녀는 내가 속한 방송 프로그램 팀으로 교환연수를 왔고 한창 일본어를 배우던 나는 그녀의 모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녀는 도쿄에 오면 꼭 연락을 하라며 명함을 건넸다. 일본인의 호의는 진심인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그때의 나는 ‘한국에서 일하던 나’를 알고 있는 이를 만나고 싶었다. 약속 장소인 시나가와역에 도착했다. 높은 건물의 회사들이 모인 시나가와는 꼭 한국의 옛 직장이 있던 여의도와 닮았다. 그녀를 따라 뒷골목의 작은 선술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만났던 이들의 안부, 도쿄에 대한 인상을 나누며 대화는 무르익었다.     

 

“정말 도쿄에 왔군요. 대단해요. 기분은 어때요?” 

“사실은 조금 우울해요. 제가 한국에서 했던 경력이 여기선 쓸모가 없어요. 일본어를 그만큼 잘하지 못하니까요.”      


그녀는 나의 넋두리를 한참 들어주었다.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며 떨어진 이야기, 쓸쓸하고 고단하고 외로운 마음들, 나도 모르게 속내를 술술 털어놓았다. 확인받고 싶었을까. 이곳에서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내가 일하던 모습을 본 그녀 앞에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나 보다. 그 사이 주문한 음식이 우리 앞에 놓였다.      


뚜껑이 덮여있는 자기로 만든 작은 컵이었다. 열었더니 밝은 노란빛이 도는 내용물이 보였다. 일본식 계란찜 ‘차완무시’라고 했다. 작은 수저가 푹 하고 들어갔다.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간이 되어 있는 순두부처럼 입에서 살살 녹았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의 계란찜과 닮았는데, 맛이 정말 달라요.”

“이건 일본 스타일이니까요.”      


그렇다. 나는 지금 서울이 아닌 도쿄에 있다. 맛은 달라도 주재료는 변하지 않듯,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야. 꼭 서울에서 했던 일을 또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일본에선 또 다른 맛을 내는 이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찻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차완무시를 먹으며 생각했다. 이 시간이 또 다른 나를 찾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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